청와대를 떠난 문재인 전 대통령의 퇴임 뒤 출근지는 경남 양산시의 30평짜리 동네책방이다. 가족 휴가나 서울 일정이 없는 날이면 앞치마를 두르고 책을 팔며 방문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평산책방은 8일 개점 1200일을 맞았다. 그동안 책방에서 발생한 수익은 어린이·청소년과 작은도서관·동네책방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23년 4월26일 경남 양산시 '평산책방'에서 앞치마를 착용한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연합뉴스
10일 평산책방이 공개한 자료와 공익법인 결산 서류 등을 종합하면 2023년 4월25일 개점 이후 누적 방문객은 62만8769명으로 집계됐다. 하루 평균 523명이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에 있는 작은 책방을 찾은 셈이다.
문 전 대통령은 별도의 보수를 받지 않고 자원봉사 형태로 책을 판매하며 방문객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도 응했다. 자신이 읽고 인상 깊었던 책을 소개하는 일도 '책방지기 문재인'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문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공개적으로 추천한 책은 모두 124권으로, 열흘에 한 권꼴이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문 전 대통령과 유시민 작가 등의 추천을 받은 뒤 2022년 12월 둘째 주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상당수는 퇴임 뒤 형사재판에 넘겨져 영어의 몸이 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미국 하와이로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퇴임하거나 파면된 뒤 형사재판과 독방 생활을 겪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역시 파면 이후 여러 형사재판을 받고 있으며 현재 서울구치소 독방 안에 수감돼 있다.
물론 임기를 마친 뒤 정치 원로로 남은 사례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을 중심으로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내외 강연과 한반도 평화 관련 활동을 이어가며 전직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 전 대통령 이전에 지역으로 돌아가 주민들과 접점을 넓힌 전직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퇴임 뒤 고향인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돌아가 친환경 농업과 화포천 정화 사업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퇴임 1년3개월 만인 2009년 5월 서거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이끄는 지역 활동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봉하마을은 노 전 대통령의 구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의 삶을 기리는 추모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 이듬해인 2023년 평산책방을 열었고, 3년3개월째 책방지기로 활동하고 있다.
평산책방은 책 판매 등으로 발생한 수익을 재단에 귀속해 공익사업에 사용한다. 개점 이후 형편이 어려워 책을 사기 힘든 어린이와 청소년 2122명에게 4466권의 책을 선물했고, 양산을 비롯한 전국의 작은도서관에도 5230권을 기증했다. 작가 섭외와 강연료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동네책방 약 100곳에는 작가 초청을 지원했으며, 별도 코너를 통해 전국 동네책방 50곳을 홍보했다.
문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가 처음부터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평산마을로 돌아온 직후 사저 주변에서는 보수단체와 개인의 확성기·욕설 시위가 100일 넘게 이어졌다. 문 전 대통령 부부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소음 피해를 호소하면서 대통령 경호처는 2022년 8월 사저 경호구역을 최장 300m까지 확대했다.
평산책방의 1200일은 전직 대통령의 사회 활동이 정치 현안에 대한 발언이나 기념사업에 머물지 않고, 지역의 문화·공익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