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가 경제적 영향력을 가진 부자들에게 장악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과거에는 초부유층이 로비를 통해 압력을 행사했는데 지금은 로비나 후원뿐 아니라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등 보다 노골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초부유층은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업계나 업체, 혹은 본인에게 큰 혜택을 주는 정책을 추진하고, 과거와 달리 대중에게 자선 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미국에서도 초부유층에 관한 일반 시민의 반감이 커지고 있다.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가 2025년 2월20일 미국 메릴랜드주 내셔널 하버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 무대에서 정부 예산을 삭감하겠다며 전기톱을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파이낸셜타임스는 8일(현지시각) 특집 분석기사를 통해 "초부유층은 로비를 넘어서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에 취업하기까지 했다"며 "이런 태도에 일각에서는 미국에서 새로운 과두정치가 생겼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보도했다.
미국에서 부유층은 일반적으로 높은 소득과 상당한 자산이 있으나 여전히 고소득 직업이나 사업으로 경제활동을 벌인다. 반면 초부유층(슈퍼리치)은 초고액 자산을 바탕으로 막대한 금융소득(이자 및 투자소득)을 벌어들이면서 강력한 경제 권력도 행사하고 있다.
초부유층은 백악관 모금 사업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초대받아 함께 만찬을 즐긴다. 일부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관료로 일하고 있다. 예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투자은행 '캔터 피츠제럴드'의 CEO로 일했다.
로 칸나 민주당 하원의원은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초부유층들이 직접 정부에 들어갔다"며 "과도하게 큰 부를 가진 일부가 미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했다"고 설명했다.
초부유층과 트럼프 행정부의 결탁으로 트럼프 내각 구성원들의 순자산 총액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억 달러(약 11조 원)에 달한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까지 포함하면 140억 달러(약 20조 원)에 이른다.
초부유층은 이 같은 결탁의 결과로 여러 특혜를 누렸다. 특히 정부가 초부유층와 관련된 업계나 기업에 우호적 정책을 펼치면서 이들은 막대한 부를 얻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트럼프 행정부에서 AI 및 암호화폐 담당 책임자로 일했던 실리콘 밸리 벤처투자가 데이비드 삭스가 꼽힌다. 삭스는 책임자로 일할 당시 일부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중국 수출 제안 완화를 추진하고 각 주 정부의 AI 규제 권한을 제안했다.
비평가들은 삭스의 벤처 캐피털 회사인 크래프트 벤처스가 당시 행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를 진행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초부유층도 행정부의 '친 초부유층 정책'으로 이득을 봤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하나의 큰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을 통과시켰는데 여기에는 초고액 자산가들을 위한 상당한 세금 감면 혜택이 포함됐다.
초당파 연구단체인 예상정책우선순위센터가 2026년 2월에 내놓은 분석에 따르면 이 법안은 미국 내 소득 상위 1%에게 하위 60%에 견줘 3배나 큰 감세 혜택을 제공했다. 이 법안은 동시에 부족한 세수를 채우기 위해 식량 지원, 교육, 저소득층 미국인을 위한 건강보험 제도 예산을 삭감했다.
초부유층의 영향력은 지난 2010년 미국 대법원이 기업의 선거 자금 지출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미국 수정 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된다고 판결하자 크게 늘었다.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인 '공정한 세금을 위한 미국인 연합(ATF)'이 2025년 4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미국 부자들은 선거에 3100만 달러(약 439억 원)를 후원했다. 반면 2024년 선거에서는 상위 100대 억만장자 가문만 26억 달러(약 3조6800억 원)를 기부했다. 약 84배가 늘어난 것이다.
특히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 카지노 운영 회사인 라스베이거스 샌즈의 최대 주주 미리암 아덴스, 금융 자산가 집안의 상속자인 티모시 멜론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사용된 약 15억 달러(약 2조1200억 원) 가운데 3분의1 이상을 차지했다.
칸나 민주당 하원의원은 "기부자들은 세금 감면, 규제 완화, 암호화폐 관련 범죄에 관한 주 정부의 차별 완화, 화이트칼라 범죄 처벌 감소라는 혜택을 누렸다"며 "자본가 계층이 완전한 특혜를 얻은 셈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민주당 역시 초부유층의 기부를 받고 있다. '블라인드 스팟 : 과두정치는 어떻게 우리 민주주의를 지배하는가'의 저자인 제프리 윈터스는 "2024년 대선 당시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겸 민주당 대선 후보는 선거 자금 20억 달러(약 2조8300억 원)를 모았다"며 "많은 부자들이 여기에 수천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에서도 초부유층이 존재한다. 2028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J.B.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는 하얏트 호텔 재벌 상속인이자 미국 내 최고 부자 중 한 명이다.
초부유층이 정부에 개입해 정책을 멋대로 주무르는 과두정치적 현상이 나타나면서 일각에서는 19세기 후반 미국과 현재 미국을 비교하기도 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철강 재벌인 앤드류 카네기, 전설적인 금융인 J.P. 모건, 대부호 존 D. 록펠러 등 소수의 기업가와 금융가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족벌주의와 부패가 만연한 체제 속에서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나중에 '강도 귀족'(Robber Baron)이라 불렸다.
다만 이들과 현대 초부유층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보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역사를 가르치는 퀸 슬로보디안 역사학 교수는 "19세기 후반의 재벌들은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대학교, 재단, 도서관 등을 설립해 미국 대주에게 혜택을 제공했다"며 "현대의 재벌들은 대중 친화적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슬로보디안 교수는 "대표적인 예시로 머스크 CEO가 있다"며 "그는 미국 정부효율부에서 일하며 미국의 국제 원조 기관인 USAID를 해체하고 수만 명의 공무원을 해고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대중의 반발 등 반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