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기업들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우회수입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새로운 규제를 내놨다.
중국기업의 해외 자회사에도 '첨단 반도체 수출규제'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5년 10월30일 부산 김해공군기지 의전실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며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2일 로이터를 비롯한 글로벌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미국 상무부는 최근 해외에 위치한 법인이라도 본사가 중국에 있다면 미국의 최첨단 반도체를 구매할 때 반드시 미국 정부의 사전허가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새로운 지침을 발표했다.
미국 상무부는 "중국 또는 마카오에 본사를 둔 기업이라면 해외 어느 나라에 세운 자회사라도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허가 요건을 그대로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왜 중국기업의 '해외 자회사'까지 압박할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AFP통신=연합뉴스
미국은 2022년부터 중국기업에 대한 첨단 반도체 수출금지를 단계적으로 강화해왔다. 그러나 중국기업들은 이미 이 규제를 예상한 듯 발빠르게 우회로를 만들어왔다.
대표적 방식이 동남아시아나 중동에 현지법인을 설립한 뒤 그쪽으로 첨단 반도체를 수입하는 것이다. 마치 통행이 막힌 고속도를 피해 옆에 있는 국도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미국 상무부는 이번 지침에서 중국기업들이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나 유럽의 해외 자회사를 통해 대형 데이터센터를 짓고 그 안에 첨단 AI 반도체를 대량 반입한 사례를 문제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본사는 공식적으로 반도체를 수입하지 않았지만 해외 자회사 서버를 원격으로 운용하면서 사실상 미국의 최신기술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이와 같은 '법적 허점'을 이번 지침으로 깨뜨리려고 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번에 규제대상으로 명시된 반도체는 엔비디아의 최신 AI반도체 '블랙웰'과 차세대 '루빈' 그리고 AMD의 최상위 AI칩 'MI350x' 등이다. 이 반도체들은 AI에게 생각하는 힘을 주는 '두뇌 핵심 부품'으로 챗GPT나 딥시크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를 실제로 구동하는데 꼭 필요한 부품이다.
다만 미국 상무부는 "이미 합법적으로 구매를 완료해 가동 중인 첨단 반도체의 사용까지 강제로 중단시키거나 유지보수를 막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사전에 구입한 반도체는 쓸 수 있지만, 앞으로 새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막을수록 강해지는 중국 인공지능 - 화웨이와 딥시크의 역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세계 3대 IT 전시회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25'가 개막한 2025년 3월3일(현지시각) 화웨이의 부스 전경. ⓒ 연합뉴스
문제는 미국이 조이고 있는 '반도체 포위망'이 실제로 중국의 인공지능 굴기를 멈출 수 있느냐는 점이다. 현재까지 흐름을 살펴보면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가장 주목할 대목은 중국 기업 화웨이의 성장이다.
미국이 2019년 화웨이를 미국 반도체 수출금지 리스트에 올리고 각종 제재를 가하자, 화웨이는 자체 인공지능 반도체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물이 '어센드(Ascend)' 시리즈다.
어센드란 이름 그대로 상승을 뜻하는 화웨이의 인공지능 전용 반도체 브랜드다. 어센드는 데이터센터에서 인공지능을 구동할 용도로 설계됐다.
최신형 어센드 반도체(어센드 950PR)는 2026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양산에 들어갔으며, 인공지능이 사용자의 질문에 답변을 생성하는 추론 단계에 특화된 반도체로서 최근 주문량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화웨이가 올해 인공지능 반도체 매출로 약 120억 달러(한화 약 18조1천억 원)를 거둬들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같은 수치는 2025년 75억 달러(약 11조3천억 원)과 비교해 60%에 늘어난 수치다.
화웨이는 2026년 중국 내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서 최대 점유율을 차지할 것으로 파이낸셜타임스는 전망했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중국의 굴기는 매섭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올해 공개한 딥시크 V4 모델은 엔비디아 반도체가 아닌 화웨이와 캠브리콘 등 중국산 반도체로 구동되도록 설계됐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모습은 중국이 반도체(하드웨어)와 AI 모델(소프트웨어)을 함께 국산화하는 'AI 자립 생태계'를 사실상 완성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IT업계 일각에서는 미국의 제재가 역설적으로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앞당겼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의 규제가 없었다면 중국이 계속 저렴한 엔비디아 칩을 써왔을 텐데, 미국의 제재가 오히려 중국의 기술개발 투자를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젠슨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5월3일 민간 싱크탱크 '특별경쟁연구프로젝트(SCSP)와 나눈 인터뷰에서 "중국에서 엔비디아의 시장 점유율은 0(제로)으로 떨어졌다"며 "중국처럼 큰 시장 전체를 내주는 것은 전략적으로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으며, 이미 상당부분에서 역효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미국 상무부의 중국 기업의 해외자회사 제재는 미국과 중국 간 AI 기술패권 전쟁의 새 국면을 연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포위망'을 더욱 촘촘히 조이고 있지만, 중국은 그 포위망 안에서 스스로 기술력을 키우고 있다. 과연 미국의 규제가 중국의 AI 자립시계를 멈출 수 있을지, 아니면 오히려 태엽을 감아주는 격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