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을 문신으로 휘감고 매서운 눈을 희번덕거린다. <늑대사냥>에서 서인국이 연기한 종두는 웃는 얼굴에서도 살기를 뿜는다. 동남아시아로 도피한 인터폴 수배자 중 우두머리인 종두는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솟구치는 피 앞에서도 이죽거리는 종두의 희열 속에 캐릭터와 혼연일체된 배우의 묘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예능 프로그램 <슈퍼스타K> 시즌1 우승자로 대중 앞에 선 게 2009년. 2012년 드라마 <사랑비>로 연기를 시작해 같은 해 <응답하라 1997>의 윤윤제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내보인 서인국은 이후 오피스 활극, 로맨스, 사극, 스릴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에서 주연을 맡았다. 장난기 넘치는 인상과 차가운 표정을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장르물에 더없이 어울리는 마스크를 뽐내온 이 배우의 악역 연기는 몸에 착 감긴 문신처럼 낯설지만 자연스럽다. 작품을 통해 기량을 연마하며 기다려온 첫 번째 악역을 서인국은 이렇게 해냈다.
토론토 영화제서 해외팬 많이 만나
<늑대사냥>이 제4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매드니스 부분에 공식 초청됐다. 영화제에 참석해 한껏 긴장한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건 가문의 영광이고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처음 일정을 봤을 땐 해외 프로모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시상식도 자주 가봐서 턱시도를 입을 때까지도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레드 카펫에 올라가려고 대기하는 순간 심장이 너무 뛰더라. 레드 카펫 위에서 바로바로 인터뷰를 하는데 옆에서 팬들이 계속 환호성을 질러주니까 축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팬과 소통하는 시간도 마련되어 있어서 즐거웠다. 100년 된 극장에서 영화를 시사했는데 관객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었다. 영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때마다 축구 경기 보듯 관객이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관객의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이렇게도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날은 왜 그렇게 떨렸나. 무대는 익숙하지 않나.
= <슈퍼스타K>나 MAMA(Mnet Asian Music Awards) 같은 무대는 준비해서 직접 공연하는 거잖나. 그런데 내가 이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라고 소개하는 게 갑자기 설레고 부끄럽고 떨리더라. 스탭들에게 종종 그런 얘기를 한다. 같이 한번 서인국을 만들어보자고. 나는 나고 마치 부캐처럼 배우인 서인국, 가수인 서인국이 따로 있는 거다. 내가 뭔가 만들어낸 것을 내보일 때 즐겁기도 하지만 긴장될 때도 많다.
배우 서인국을 소개하느라 개인 서인국이 떤 셈이다. 현장에서는 어떤 질문을 받았나.
= 토론토는 처음이라 배우 서인국에 대한 정보가 한국만큼 많지 않았기에 형식적인 질문이 많았는데, 의외로 해외 팬들이 많았다.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부터 <미남당>까지 언급하며 지나가는데 붙잡고 인사해주셨다. 알아봐주는 게 너무 신기했다.
"악인 연기, 로맨스보다 재밌었다"
<늑대사냥>은 잔혹한 행위가 생생하게 벌어지는 영화다. 시나리오에도 잔인한 행위들이 묘사되어 있었을 텐데 걱정되진 않았나.
= 대본에서부터 피 냄새가 엄청 났다. 하드보일드 서바이벌 장르잖나. 이런 장르를 좋아한다. 종두라는 캐릭터가 가진 잔인함과 동물적인 감각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니 너무 재미있게 느껴졌다. 마음껏 표현해봐야지 싶었다.
종두는 범죄자 집단의 우두머리다. 대장의 위상은 어떻게 드러내고자 했나.
= 종두는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저지하는 게 아니라 아예 파괴하는 사람이다. 액션 신이 많진 않았지만 그 잔혹성을 라이브하게 표현하는 움직임이 많았다. 내 오른팔이 고창석 선배, 왼팔이 정문성 형이었으니 나는 우두머리 치고 어린 편이다. 캐스팅보드를 보고 내가 이 범죄자 집단에서 무엇을 가져야 별말 없이 우두머리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감독님은 엄청 마르고 예민한 외양을 제시하셨지만 그런 범죄자의 모습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몸을 키워서 위협적인 큰 늑대처럼 보이고 싶었다. 만족스러울 만큼 몸을 키웠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문신 때문에 생각보다 얄캉하더라. (웃음)
사실 종두는 싸움에 능한 사람은 아니다. 그저 뭔 짓이라도 할 것 같은 느낌과 기세로 압도하는 인물이다. 악역이 처음이었나 싶을 정도로 표정을 편하게 쓰던데.
= 그전에도 얼굴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번엔 악만 써보자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로맨스물 할 때보다 재미있었다. (웃음)
극악무도한 악을 구현하는 데 종두만이 가진 특징을 무엇으로 보았나.
= 눈빛. 밤에 야생동물을 보면 번쩍이는 눈동자만 보이잖나. 그게 무섭다고 생각했다. 종두는 사람을 왜 저렇게 쳐다보지 싶게 노려본다. 그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짐승이 먹잇감을 보는 눈빛이다. 사냥감이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무심하다. 누가 지나가도 별 반응을 하지 않다가 뭔가 거슬리는 게 생기면 갑자기 눈빛이 돌변해서 난폭해지는 모습을 떠올렸다.
김홍선 감독과는 무슨 얘기를 나눴나.
= 촬영 전까지 별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얘기를 하자고 해도 “너 알아서 잘할 거잖아”라고만 하셨다. 감독님은 내 분위기를 좋아하셔서 크게 컨트롤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내 느낌으로 끌고 가되 대사 톤이나 장면별로는 세부적인 디렉팅을 주셨다. 한번씩 “기글기글하게 해봐!”라고 말씀하셨는데 처음 듣는 말이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좌중 웃음) 다만 감독님이 ‘기글기글’이라고 하면서 보여주는 표정을 보고 저런 느낌이구나 싶어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앉아서 표정으로만 연기할 때도 “너무 주지 마. 입꼬리 1mm만 올려!”라고 하셨다.
엄청난 디테일이다.
= 어떤 동물들은 먹고살기 위해 사냥하지만 자칼이나 아프리카 들개, 늑대의 경우 그냥 가지고 놀려고 사냥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느낌을 가져가고 싶었다. 종두가 쓰러진 사람을 칼로 찌르는 장면이 있는데 슛 들어가는 순간 왠지 힘을 세게 주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여보자 싶었는데 그저 놀잇감을 대하는 것 같은 종두의 모습을 보고 감독님이 순수할 만큼 악한 느낌을 잘 살려냈다고 좋아하셨다. 그렇게 구현해나갔다.
지칠 때는 취미 생활로 성취감 얻어
그런 순간마다 토론토 극장에 모인 사람들이 환호했을 장면이 떠오른다. 그 풍경을 상상해보면 배우에게는 두고두고 힘이 되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은데. 배우 생활하면서 힘에 부칠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기억이 있나.
= 나는 털어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과거에 내가 한 일로 힘을 내기보다 버리고 털어내고 나아가는 편이다. 힘들 때는 다른 일을 찾는다. 이것저것 취미가 많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만 진득하게 해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이거 내 문제인가? 내가 지겨움을 빨리 느끼는 성격인가?’ 고민하기도 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번아웃에 관련된 글을 읽었다. 작은 성취감을 가지라는 가벼운 조언이었다. ‘똥손’이지만 최근에 인센스 홀더를 만들어서 기분 좋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내가 작은 즐거움을 누리려고 시도한 것들이 어쩌면 본능적으로 내가 버티려는 행위였구나,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취미생활도 이것저것 해대는 성격으로만 여겨져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수기 때마다 내 나름 소소한 성취감을 쌓았던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 대견하게 느껴지더라. (웃음)
대국민 오디션에서 1등을 차지하며 시작할 때부터 큰 성취를 쌓아온 커리어를 생각하면 의외다.
= 내 직업은 언제나 평가를 받는다. 이 인터뷰도 공개되면 사람들은 서인국이 좋다, 나쁘다, 모르겠다 등등 판단을 내릴 거다. <슈퍼스타K>도 서바이벌이라 나라는 존재를 평가받는 일이었잖나. 그 뒤의 노래나 작품, 예능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13년을 보내다보니 남들의 평가에 예민해지고 스스로를 더 엄격하게 바라보게 됐다. 활동 초기에는 무슨 얘기가 들리면 ‘내가 문제인가, 내가 이상한 건가’라고 자꾸 내 문제로 가져왔다. 그래서 자꾸만 털어버리려고 다른 일에 골몰했던 것 같다.
배우 생활 10년이 지난 지금, 실제 서인국과 배우 서인국의 관계는 어떤가.
= 사이는 좋지 않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렵다. 연기를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그게 내 인생 최대의 건방짐이었다. (웃음) 슬픈 신이니까 눈물을 흘려야 해, 행복하니까 행복을 표현해야 돼.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걸 정답처럼 여긴 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느 날, 왜 슬프다고 이렇게 울어야 할까? 웃으면서 울 수도 있는 거고 눈물 흘리지 않아도 슬퍼할 수 있는 건데. 왜 나는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머릿속이 땡 하고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모든 표현이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민도 많아지고 스스로 괴롭힌다는 기분까지 들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해가는 과정에서 많이 유연해졌다고 생각한다.
"색다른 장르, 다양한 캐릭터 만나고파"
가장 유연하게 연기해냈다고 느낀 작품은 무엇인가.
= 감정을 꼬아서 표현해보고 싶다, 반대로 연기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계속 있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가 드라마 <38사기동대>를 만났다. 한동화 감독님이 “연기할 때 20%의 감정을 빼고 해보자. 연기 못한다는 소리 안 듣게 내가 무조건 약속한다”고 하셔서 드디어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처음엔 잘 안됐다. 불안하더라. 내가 이 정도는 해줘야 보는 사람들이 느낄 텐데 덜어내도 될까 싶었지만 <38사기동대> 작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강약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에서 유제원 감독님과 작업할 때도 지문에 쓰인 표현을 꼬아서도 해보고 반대로도 해보고 자유자재로 표현해봤다.
<늑대사냥>을 통해 이전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역이 들어오기를 기대한 것도 있나.
= 감사하게도 감독님들이 나를 볼 때 로맨틱 코미디 이미지로만 보진 않는다. 실제 악역도 많이 들어온다. 악역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늑대사냥> 시나리오를 봤을 때 온몸에 피가 튄 내 모습이 궁금했고 콤플렉스라고 여겼던 내 눈도 색다르게 표현될 것 같은 기대감이 컸다. 배우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캐릭터였다. 내 안에 이미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방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그 방은 단칸방에 TV도 없고 휑했지만 종두 덕분에 소파도 생기고 사람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방이 됐다. 로맨틱 코미디의 방은 이미 대저택으로 꾸며놨다. (웃음) 이제 종두가 있는 방도 대저택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연기를 시작한 10년 전에는 어떤 드라마든 주인공은 한결같이 순수하고 지고지순했다. 이제 드라마에서도 선악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잖나. 점점 장르가 다양해지고 캐릭터가 바뀌는 시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색다른 장르의 다양한 캐릭터를 더 해보고 싶다.
MBTI의 파워 P답게 취미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곧 콘서트도 열고 새 작품에도 들어갈 텐데. 바쁜 와중에도 지속하는 일이 있다면.
= 인터뷰 끝나자마자 바다가 보고 싶으면 바로 떠날 수 있는 P다. (웃음) 다이어트를 계속하고 있다. 이전에는 성수기 때 관리하고 비수기 때는 진짜 많이 먹었다. 몇년 전부터 일정 선을 두고 어느 정도 이상 몸을 불리지 않으려고 한다. 먹을 때도 머릿속으로 늘 다이어트 생각을 한다. 비수기 때도 내가 좋아할 만한 몸을 갖고 싶다. 나에게 집중하면서 더 지속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도 나에 관해 하나하나 잘 꾸며가려고 한다. 게임에서 경험치를 쌓고 장비를 늘리고 스킬을 더하는 것처럼 나를 키워나갈 예정이다. 여전히 나에게 엄격한 면이 있지만 사람들의 칭찬에 춤추면서 레벨업해나가고 싶다.
글 김수영 사진 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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