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한때 'N포 세대'라는 말이 있었다. 연애와 결혼, 출산 등 점점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의 현실을 담은 표현이었다. 개인의 포기처럼 보이는 선택 뒤에는 취업난과 주거비 부담, 불안한 미래가 있었다.
일본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요즘 '○○ 캔슬'이라는 말이 쓰인다. 목욕을 건너뛰는 '목욕 캔슬', 연애를 하지 않는 '연애 캔슬', 잠을 줄이는 '수면 캔슬'까지 등장했다. 일상적인 행동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캔슬계(キャンセル界隈)'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픽사베이
28일 엑스(X·옛 트위터) 검색창에 '캔슬계'를 입력하자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을 '취소'한다는 글들이 눈에 띄었다. 시작은 2024년 SNS에서 화제가 된 '목욕 캔슬계'였다.
이후 연애와 수면, 인간관계, 잔업과 직장 후배 육성까지 취소의 대상이 넓어졌다. 후지뉴스네트워크(FNN)도 올해 10월10일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캔슬 문화를 조명했다.
N포 세대와 캔슬계가 가리키는 현상은 다르다. 전자가 삶의 주요 과제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일상의 번거로움을 가볍게 표현하는 인터넷 유행어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두 표현은 비슷한 질문을 남긴다. 정말 원하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하고 싶어도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일까.
"귀찮아서요", 그런데 목욕할 기력도 없다
지난 9월21일 엑스(X·옛 트위터)에 올라온 ‘캔슬계’ 관련 반응.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해봤다. ⓒ엑스 계정
일본 시장조사업체 아스마크가 2025년 5월15~19일 전국 20~34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실시해 같은 해 10월9일 공개한 결과를 보면, 목욕을 건너뛰는 날이 있다는 여성의 42.5%는 '귀찮아서', 41.0%는 '피곤해서 목욕할 기력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목욕이 귀찮은 것과 목욕할 힘이 없는 것은 다르다. 옷을 벗고 몸을 씻은 뒤 머리를 말리는 과정까지,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도 지친 날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캔슬'이라는 표현이 이런 사정을 외면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지난 9월21일 엑스에는 "젊은이가 게으른 게 아니다. 그냥 사는 것만으로도 여유를 다 써버리고 없다. 이대로면 곧 '인생 취소계'가 생길 것", "보도에서 '캔슬계'라는 단어를 쓰는 게 진짜 기분이 나쁘다. 빈곤이라고 해라" 등의 일본어 게시물이 올라왔다.
일부 이용자의 반응을 일본 사회 전체의 인식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일상을 생략하는 행동을 가벼운 유행이나 개인의 선택으로만 다루는 데 대한 거부감이 드러난다.
일본의 경제 상황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실질임금은 2025년 전년 대비 1.3% 줄며 4년 연속 감소했다. 생활비 부담도 이어지고 있다. 총무성이 지난 23일 발표한 9월 전국 소비자물가지수는 종합지수 기준 전년 동월보다 2.1% 올랐다.
일본은행이 지난 13일 발표한 생활의식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4.4%는 1년 전보다 생활의 여유가 줄었다고 답했다. 여유가 늘었다는 응답은 4.5%였다. 조사는 8월3일부터 9월4일까지 전국 만 20세 이상 성인 4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1972명이 유효 응답했다. 청년층만의 결과는 아니지만, 생활의 부담이 폭넓게 체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활의 여유가 줄면 무엇을 덜어낼지 고민하게 된다. 지출일 수도, 사람을 만나는 약속일 수도 있다. 피로까지 겹치면 씻는 일처럼 사소한 일상마저 버거워질 수 있다. 캔슬이라는 말 뒤에 어떤 부담이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쉬려고 켠 SNS에서도 피로가 쌓인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 ⓒ픽사베이
일본 조사업체 크로스마케팅이 올해 6월4~5일 전국 20~69세 남녀 3천 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실시해 7월2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SNS 이용자의 45%는 SNS에서 잠시 거리를 두거나 쉬고 싶었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피로를 느끼는 상황으로는 '정보량이 너무 많을 때'가 40%로 가장 많았다. 특히 젊은 층일수록 다른 사람의 게시물을 보며 지치거나 자신과 비교할 때 피로를 느낀다는 응답 비율이 높았다.
쉬려고 들여다본 화면에는 다른 사람의 여행과 소비, 연애 이야기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휴식의 시간이 비교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취소하는 일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한편 부담을 느낄 때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살펴볼 대목이다. 일본 사회에서 널리 퍼져있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규범도 이런 문제와 관련해 논의된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거나 고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취소'라는 말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정
'포기'에는 하고 싶었던 일을 내려놓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취소'는 자신의 판단으로 예정된 일을 그만두는 것처럼 들린다. 한국의 N포 세대라는 말이 청년들이 무엇을 포기해야 했는지 물었다면, 일본의 캔슬계라는 말은 무엇을 하지 않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사정은 그 이름에 담겨 있지 않다.
모든 '캔슬'을 불가피한 포기로 볼 수는 없다. 불필요한 일을 줄여 자기 시간을 확보하려는 선택도 있고, 유행어를 가볍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여유를 잃고 피로와 무기력 속에서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일상마저 취소하는 현상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그 배경에 놓인 생활 여건을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