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 대신 도착하는 것은 항상 '예고'다. 오늘은 오지 못하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예고.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다.
금융당국의 지배구조 개선안을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도가 떠오른다. 방안을 마련하겠다. 협의를 거쳐 발표하겠다. 1월부터 10월까지, 발표를 기다리는 달은 바뀌어도 '예고'의 문장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반면 금융당국이 금융회사에 건네는 말은 항상 '지금'을 향하고 있다. 절차를 고치고, 견제를 강화하고, 자회사 CEO 인선을 투명하게 하라. 개선안은 10개월 동안 미래를 기약하고 있는데, 금융회사를 향한 주문은 계속해서 오늘 도착한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가운데)이 28일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10월28일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지배구조 개선방안의 취지를 충분히 반영해 자회사 CEO 승계절차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다 강화해 달라.”
취지를 반영하라는 그 개선방안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금융회사들은 발표되지 않은 방안의 취지를 먼저 실천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금융위원회가 금감원과 학계·법조계 등이 참여하는 지배구조 선진화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킨 것은 1월16일이다. 이사회 독립성, CEO 선임의 공정성과 투명성, 성과보수의 합리성을 높이겠다고 했다. 당시 로드맵대로라면, 개선방안은 3월까지 마련됐어야 했다.
하지만 봄이 지나가도 개선안 발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6월22일 이 원장은 KB금융지주가 회장 후보군을 추리는 7월3일 전에 개선안이 발표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 날짜도 지나갔다. 7월20일 금융위는 개선안의 내용과 발표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제 여름도 지나갔다. 최근에는 당정협의를 거쳐 이르면 11월에 발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나금융지주는 10월26일 주요 6개 계열사의 차기 CEO 최종 후보군을 확정했다. 신한금융지주도 이튿날 신한은행장과 제주은행장 1차 후보군을 압축했다. 봄에 마련하겠다던 제도를 기다리는 동안 연말 인사철이 먼저 도착해버렸다.
그동안 비어있는 자리는 거듭되는 금융당국 주문과 경고가 채우고 있다. 이 원장은 26일 금감원 부원장 회의에서 자회사 CEO 선임이 끝나면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틀 뒤에는 이사회 의장들에게 개선방안의 취지를 반영하라고 당부했다.
공정하게 사람을 뽑고 경영진을 제대로 견제하자는 취지는 어렵지 않다. 금융회사들이 공정과 투명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서 개선안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누가 후보를 추천하고, 누가 검증하며, 무엇을 기록하고 어디까지 공개해야 하는지, 새 기준은 어느 인선부터 적용되는지를 알아야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
문서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은 결국 당국자의 말에서 찾아야 한다. '말의 해석'이 중요해질수록 이사회의 관심은 후보자의 경영 능력에서 감독자의 속뜻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BSM(이사회 역량 구성표)에 당국의 뜻을 읽는 '독심술' 능력을 넣어야 할 판이다.
이사회가 경영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당국의 지적은 옳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사회가 자기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후보를 충분히 검증할 정보와 시간, 경영진에게 이의를 제기할 권한, 그 판단을 주주에게 설명할 책임이 필요하다. 잘하라는 말과 잘했는지 나중에 보겠다는 경고 사이에서 알아서 길을 찾으라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공개된 기준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준이 있어야 금융회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고, 시장은 당국이 그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절차를 밟은 회사에 다른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는지, 특정 인물을 앞에 두고 요구가 달라지지는 않았는지도 따져볼 수 있다.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감독당국의 개선안 역시 '평가대'에 오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도가 늦어지고 '쓴소리'만 거듭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감독당국의 개선안이 적절한지, 시장 상황에 맞는지, 실제로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데 효과적인지 시장과 국민이 평가할 시간은 줄어든다.
당연히 당국에도 사정은 있을 터다. 금융위와 금감원이 함께 추진하는 일이고, 법을 고쳐야 하는 과제에는 국회의 동의도 필요하다. 회장 연임을 어디까지 제한할지, 경영진을 견제하면서 주주의 선택권은 어떻게 지킬지 쉽게 결론 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날짜에 맞추기 위해 설익은 안이 나와서도 안 될 문제다.
그러나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설명도 더 필요하다.
어떤 쟁점 때문에 합의가 늦어지는지, 어디까지 정리됐고 무엇이 남았는지, 올해 인선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 알려야 한다. 내부 회의를 생중계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스스로 제시한 시한을 넘겼다면 기다리는 사람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케트는 고도가 왜 오지 않는지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설명하지 않는 것 자체가 고도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