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이 작품에 대한 비판을 넘어 출연 배우와 평론가 개인을 겨냥한 괴롭힘으로 번지고 있다.
배우의 SNS에 악플이 쏟아진 데 이어 주연 배우의 자택 앞 집회까지 예고되면서 문화예술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개인을 향한 '표적 괴롭힘'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배우 유해진이 9월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암살자(들)'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극우 성향의 김상진 신자유연대 대표는 1일 쓰레드를 통해 주연 배우 유해진의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 앞에 집회 신고를 마쳤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내가 집회 하면 아마도 기획사에서 유해진 거처를 옮길 것을 예상되는데, 추후 '가출해 도망간 유해진' 입증해 보이겠다. 투쟁!!!"이라고 적었다.
김상진 신자유연대 대표는 1일 자신의 쓰레드 계정을 통해 영화 ‘암살자(들)’ 주연 배우 유해진의 자택 앞에서 집회를 열기 위한 신고를 마쳤다고 밝혔다. ⓒ김상진 쓰레드 계정
김 대표는 유해진의 자택으로 추정되는 건물 사진과 집회 신고서도 공개했다. 신고서에는 집회 기간이 10월 3일부터 30일까지로 적혀 있었다. 공개된 사진에서는 주택의 도로명 번호까지 식별할 수 있는 상태여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개인의 주거공간이 정치적 항의의 장소가 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2022년 문재인 전 대통령 퇴임 이후 경남 양산 평산마을 사저 주변에서는 반대 단체 등의 집회가 장기간 이어졌다. 확성기를 이용한 집회와 고성·욕설 등으로 인근 주민들이 소음 피해를 호소했고, 경찰에 집회 규제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번 논란이 영화의 역사 해석을 둘러싼 비판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배우의 자택을 집회 장소로 삼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란이 예상된다. 제작사나 극장 등 작품과 직접 관련된 공간이 아닌 배우의 생활공간을 찾아갈 경우 작품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배우 개인과 주변 주민에게 고통과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 채널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동영상 목록.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유튜브 채널
논란은 출연 배우뿐 아니라 영화평론가에게도 번졌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출연한 유튜브 채널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의 '암살자(들)' 리뷰 영상은 지난달 말 비공개로 전환됐다. 제작진은 "영화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어 9월25일에 업로드된 리뷰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이동진은 이 영화에 별점 5점 만점에 3점을 주고 "사건의 흐름과 틈새를 밀도 높게 파고드는 시선"이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이후 리뷰에서 내놓은 "그냥 음모론 정도로 치부할 수가 없어요"라는 발언 일부가 온라인에서 확산되면서 비판이 이어졌다.
이동진은 이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해당 발언을 둘러싼 논란에 직접 입장을 밝혔다. 이동진은 "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에서 발사된 총탄들의 행방과 소재를 둘러싼 의문을 비롯해, 당시의 공식 발표만으로는 선뜻 해소되지 않는 지점들을 이 영화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며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의 배후였다는 주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9월28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암살자(들)' 포스터. ⓒ연합뉴스
이동진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박 대통령이 육 여사의 암살 배후'라는 해석을 떠올리기는 어렵다는 게 제 판단"이라며 "유족분들이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박 대통령이 육 여사의 암살 배후'라는 음모론을 제기할 수 있느냐는 질타는 존재하지도 않는 주장을 가정한 후 공격하는 것이기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동진은 이어 "이 영화에 대한 제 견해는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제 견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암살자(들)에 대해 제가 했던 평가를 철회하거나 그 평가 자체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영화를 둘러싼 비난이 출연 배우와 평론가 개인에게까지 번지자 온라인에서는 이를 풍자하는 게시물도 등장했다. 이른바 '극우 말투 벌금서'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공유되며 과격한 표현과 비난 일변도의 온라인 문화를 꼬집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온라인 상에서 공유되고 있는 '극우 말투 벌금서' 내용이다. 엑스 계정
특정인을 지속적으로 지목해 공격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는 '표적 괴롭힘(targeted harassment)'으로 불린다. 주소 등 개인정보를 온라인에 공개해 괴롭힘이나 위협의 위험을 높이는 행위에는 '독싱(doxxing)'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이 같은 개인을 겨냥한 공격과 압박은 당사자의 피해를 넘어 표현의 자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격이나 위협을 우려한 창작자·평론가·언론인 등이 논쟁적인 주제를 피하거나 스스로 표현을 제한하는 이른바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허진호 감독이 9월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암살자(들)'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영화제작가협회도 지난 1일 이 같은 상황에 우려를 나타냈다. 협회는 입장문을 통해 "영화와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과정"이라면서도 "작품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제작 과정이나 참여 창작자와 관련해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확산되거나, 작품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작사와 감독, 배우, 스태프 등 개별 창작자에게 과도한 비난이 이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협회는 "한국영화가 앞으로도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관객의 자유로운 평가와 비판이 보장되는 동시에, 창작자들 역시 과도한 외부 압력에 대한 우려 없이 창작에 임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암살자(들)'는 9월23일 개봉 이후 관객을 꾸준히 모으고 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결과, 1일 하루 동안 5만5천여 명이 관람해 매출액 점유율 21.8%를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누적 관객은 182만2천여 명으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