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곧 직업의 생명인 성우들에게 인공지능(AI)의 음성 복제는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목소리를 본뜬 AI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까지 만들어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 성우 츠다 겐지로. ⓒ츠다 겐지로 인스타그램 계정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 법원이 사람의 목소리도 퍼블리시티권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첫 판단을 내놨다. 퍼블리시티권은 유명인의 이름이나 얼굴 등 개인의 정체성이 지닌 경제적·상업적 가치가 무단으로 이용당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이번 판단은 애니메이션 '주술회전'의 나나미 켄토, '유희왕 듀얼몬스터즈'의 카이바 세토 등으로 유명한 일본 인기 성우이자 배우 츠다 겐지로(55)가 제기한 소송에서 나왔다.
도쿄지방법원은 9월30일(현지시각) 츠다 겐지로가 동영상 플랫폼 틱톡(TikTok) 운영사를 상대로 제기한 게시물 삭제 청구 소송에서 츠다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고 일본 TV아사히와 후지TV(FNN) 등이 보도했다.
다만 재판부는 "사람의 목소리는 초상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인격을 상징한다"는 취지로 판단하면서, 실연자의 목소리 역시 퍼블리시티권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일본에서 목소리를 퍼블리시티권의 보호 대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 첫 사법 판단이다.
사건은 틱톡의 한 익명 계정에서 시작됐다. 오리콘뉴스와 지지통신의 9월30일 보도에 따르면, 이 계정에는 2024년 7월부터 2025년 9월까지 도시전설과 심령현상, 잡학 등을 다룬 영상 188개가 올라왔다. 츠다 측은 영상에 사용된 AI 내레이션이 자신의 목소리를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계정은 팔로워 약 21만 명을 보유했고, 츠다 측은 게시자가 조회 수에 따른 보상으로 월 50만~75만 엔(430만~645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주장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문제의 틱톡 계정과 영상은 삭제됐다. 법원은 이미 삭제 대상이 사라진 만큼 틱톡 측에 삭제 의무를 인정할 수 없다며 츠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문제가 된 영상들이 실제로 츠다 개인의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했는지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츠다 측은 해당 음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이용해 시청자를 끌어들이고 있다며 퍼블리시티권 침해 등을 주장했다. 이에 틱톡 측은 문제가 된 음성이 츠다만의 독특한 음성이 아닌 '보편적인 남성의 목소리'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운영사 측은 게시자가 츠다의 실제 음성을 AI에 학습시킨 게 아니라 '친구의 목소리'를 생성AI에 학습시켰다고 설명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츠다는 특유의 낮고 굵은 목소리로 잘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인 성우다. '주술회전'의 나나미 켄토를 비롯해 '골든 카무이'의 오가타 햐쿠노스케, '체인소 맨'의 키시베 등을 연기했다.
특히 성우 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 이번 법원의 판단은 의미가 크다. 일본의 인기 성우들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방송과 광고,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팬덤을 형성한다. 목소리 자체가 성우의 인지도와 수익을 좌우하는 중요한 자산인 셈이다.
AI가 특정 성우의 목소리를 본떠 당사자가 실제로 녹음하지 않은 대사까지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면서, 이를 어디까지 개인의 권리로 보호하고 AI 음성으로 발생한 경제적 이익을 누구에게 귀속할 것인지가 새로운 법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법무성도 지난 8월7일 생성AI 관련 지침을 통해 사람의 목소리가 개인을 식별하고 인격을 상징하는 정보로서, 일정한 경우 퍼블리시티권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 같은 논란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도 성우들은 동의나 보상 없이 자신의 목소리가 AI 학습이나 합성 음성 제작에 이용되고, 복제된 음성이 실제 성우를 대체할 경우 일자리와 수입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