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후티 반군 지도부와 비밀 접촉을 갖고 예멘에서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를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는 외신보도가 나왔다. 미국-사우디 안보동맹의 균열이 표면화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사우디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직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후티 반군 격퇴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따라 사우디는 이란과 후티 반군의 공세에 자국 석유·수자원 인프라가 전면적으로 노출되는 안보 위기에 빠졌다.
사우디는 그동은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정밀 무기를 사들였고, 대미 외교에 상당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번 안보 위기는 '돈으로 안보를 살 수 없다'는 국제 정치의 불문율을 확인해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 AP통신=연합뉴스
미국이 후티 반군 지도부와 회동 뒤 예멘에서 사우디를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가디언이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15일 전했다.
미국 관리들은 지난 주말 오만 무스카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후티 반군 지도자들과 만났고, 후티 반군 측은 2025년 휴전 협정을 준수하며 홍해에서 미국 선박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사우디와 연계된 선박만 공격 대상으로 삼겠다고 확인했다.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트럼프 행정부가 항행의 자유 위협은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정작 사우디를 돕는 군사개입은 거부해온 배경이 드러난 셈이다.
사우디, 미국에 버림받다
미국이 사우디를 지원하지 않은 배경에는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더 확대되지 않기를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마이클 래트니 전 주사우디 미국대사는 미국 라디오 NPR과 나눈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발을 빼고 싶어했고, 전쟁이 잦아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원한다"며 "그래서 새로운 전선이 열리는 걸 가장 꺼린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이미 이란과 벌이는 전쟁만으로도 버거운데, 여기에 사우디까지 챙기다가 더 큰 전쟁에 휘말릴까 봐 발을 빼고 있다는 뜻이다.
사우디 스스로의 선택도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사우디는 올해 8월 튀르키예 및 파키스탄과 손잡고 '메카 공동방위협정'을 맺어, 미국을 거치지 않고도 서로 지켜주는 자체 안보망을 구축하려 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전략을 짜뒀는데, 사우디가 이 카드 없이도 다른 살길을 찾아버린 셈이다.
결국 미국의 외면과 사우디의 독자 노선이 동시에 맞물리면서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티는 '의외로' 강했다
사우디는 후티 반군의 홍해 요충지 장악으로 원유 수출길에 큰 장애가 생기며 곤란을 겪고 있다.
후티 반군은 최근 예멘서부 홍해 연안 전역을 장악했고, 9월12일에는 바브알만데브 해협 한가운데 위치한 페림섬(마윤섬)까지 점령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핵심 항로에 대한 통제력을 완성했다.
로이터는 "후티의 이번 진격은 사우디를 포함한 걸프 국가들에게 비용을 계속 감내하거나 이란과 타협하거나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형국"이라고 짚었다. 사우디는 이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상황에서 홍해 항로마저 위협받으며 원유 수출로가 동시에 막히는 이중고에 처했다.
여기에 더해 사우디의 핵심 동서 송유관이 이달 11일 이라크발 드론 공격을 받아 폐쇄됐다. 이 송유관은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해 하루 700만 배럴을 홍해 얀부항으로 실어 나르는 사우디의 '생명선'이었다.
위성사진 분석 결과 펌프장이 크게 파손돼 복구에 3~5주가 걸릴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복구한다고 해도, 드론 공격에 취약성이 드러남에 따라 언제든 다시 파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우디는 안보 불안이 '일상화'하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후티 반군은 16일 예멘 북동부 마리브주 상공에서 자체 제작한 지대공 미사일로 사우디 F-15 전투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며 잔해 사진과 영상을 공개했다. 야히야 사리 후티 반군 군사대변인은 추락한 기체를 수색하러 진입한 F-15·타이푼 전투기 2개 편대도 방공 미사일로 퇴각시켰다고 덧붙였다. 다만 사우디 당국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로이터=연합뉴스
사우디, '돈으로 산 군대'가 힘을 발휘할까
사우디의 안보 위기의 근본 원인에는 사우디의 '허약한 군사력'도 빼놓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사우디는 연간 750억 달러 이상을 국방비로 쓰는 것으로 추산된다.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F-15SA 전투기, M1A2S 에이브럼스 전차, 패트리엇·사드 방공체계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제 무기를 갖췄다.
그러나 첨단 무기 운용 능력에 있어서는 많은 의문이 이어졌다. 기술 인력 대부분이 외국인이라는 지적이 그동안 계속됐다. 돈으로 비싼 무기를 사서, 돈으로 사람을 고용해 운용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사우디는 군사훈련과 일부 군 병력을 파키스탄 등 외국에 의존해왔다. 외국인 용병이 군사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은 이런 취약점을 정조준하고 있다.
사우디는 식수의 70%를 해안 담수화 시설에 의존하는데, 이 시설들은 대부분 이란 미사일 사거리 안에 놓여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이미 걸프 지역 담수화 시설을 명시적 보복 대상으로 지목했고, 실제 쿠웨이트 담수화 시설을 타격한 전례도 있다.
사우디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국제금융 시장의 큰손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첨단무기로 무장해 중동의 강자로 자처했다. 하지만 미국-이란 전쟁으로 이란이 부상하고 미국의 역내 위상이 흔들리면서 안보 위기에 전면적으로 노출됐다. 요동치는 중동 정세에 사우디가 어떤 행보를 걸을지 관심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