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의 61년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라면 회사의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뜻밖인 자료들이 출현한다. 정몽주의 ‘포은집’ 원본부터 ‘하멜표류기’, ‘춘향전’, ‘목민심서’ 같은 고서의 필사본까지, 농심은 왜 우리 고전을 챙겨야 했을까? 사소한 음식의 역사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농심 라면 한 봉지엔 시대를 아우르는 음식들의 연대기와 식문화가 농축돼 있다.
농심 사내 도서관에 보관된 식문화 연구용 고서와 필사본. 농심은 옛 문헌 속 식재료와 음식, 식생활의 흔적을 라면과 식품 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허프포스트코리아
지난 16일 농심 기념관과 음식 연구 도서관, 연구 현장을 찾았다. 창업 초기부터 축적돼 온 제품 개발 자료와 옛 라면 봉지, 처방전, 식문화 관련 고서 등을 살펴보고 라면 스프·면 연구원들을 만났다. 18일 창립 61주년을 앞두고 농심이 마련한 자리였다.
농심 라면의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닭 육수를 중심으로 하던 라면 시장에서 농심은 처음으로 우지를 활용한 라면을 선보이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우지파동이 발생했을 때는 이미 우지가 아닌 채수 등을 활용한 제품으로 시장 1위에 올라 있었다. 우지를 활용한 제품으로 성장의 계기를 마련한 뒤에도 다른 원료와 방식의 라면을 계속 선보여온 농심의 제품 개발 과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기념관에서는 이런 변화가 제품의 모습으로도 남아 있었다. 신라면과 너구리, 짜파게티 등 익숙한 제품의 과거 봉지를 시대순으로 살펴보니 지금과는 사뭇 다른 포장과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새우깡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봉지씩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농심이 어떤 제품을 내놓았고, 제품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농심이 음식 연구를 위해 모아둔 자료의 범위는 생각보다 더 넓었다. 회사 안에는 라면을 비롯해 음식과 식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도서관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현대의 요리·식음료 서적은 물론 어린이를 위한 관련 도서와 시대별 농심의 연구 사료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중엔 정몽주의 ‘포은집’ 원본도 있었다.
라면과 직접 관련 없어 보이는 책까지, 시대와 형식을 가리지 않고 음식과 식문화에 관한 자료를 모은 것이다. 옛 문헌에서 당시 어떤 식재료를 사용했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물론, 현대의 음식 문화와 농심이 축적해온 연구 자료까지 함께 들여다볼 수 있다. 라면 하나를 연구하기 위해 음식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살피는 공간인 셈이다.
과거 연구원들이 남긴 ‘처방전’도 농심의 연구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다. 지금의 레시피와 달리 당시 처방전에는 스프의 배합과 제조법이 연구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돼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암호처럼 적힌 일부 표현은 현재 연구원들도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워, 당시의 맛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수십 년 전 라면 한 봉지를 만들기 위해 쌓인 연구 과정이 고스란히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이다.
농심 연구원에게 배운 레시피와 너구리 라면을 활용해 직접 만들어본 너구리 볶음면. ⓒ허프포스트코리아
현재의 연구 현장에서는 그 기록이 새로운 라면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스프 연구원과 면 연구원을 만나 스프와 면을 개발하는 과정, 맛과 식감을 조절하는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직접 라면을 만들어봤다.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너구리 볶음면을 직접 조리하고, 너구리를 활용해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제품과 맛을 비교하는 시간도 가졌다.
옛 고서에서 음식의 흔적을 찾고, 과거의 연구 기록을 보관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맛을 만드는 일은 61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과거의 맛을 기록해온 회사에서 오늘도 새로운 라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끓여 먹는 라면 한 봉지에는 그렇게 농심이 쌓아온 61년의 연구와 기록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