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선수들은 오랫동안 경기력과 무관한 노출을 강요하는 유니폼에 맞서 ‘무엇을 입을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스포츠를 내세워 다시 여성의 몸을 소비했다는 논란이 불붙었다.
미국 배우 시드니 스위니가 노출이 많은 모습으로 각종 스포츠 용품을 활용한 스포츠 베팅 업체 광고가 공개되면서 ‘여성 스포츠를 성적 대상을 삼았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시드니 스위니 인스타그램 계정에 13일 올라온 스포츠 베팅업체 광고. ⓒ시드니 스위니 인스타그램 계정
14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호주 ABC 등에 따르면 논란이 된 광고는 미국 스포츠 예측시장 업체 노빅(Novig)이 9일 공개한 ‘저스트 스포츠(Just Sports)’ 캠페인이다.
스위니는 이번 광고에서 나체로 등장해 미식축구공 등 스포츠 용품으로 가슴을 비롯한 신체 일부를 가린 채 포즈를 취했다. 테니스 라켓과 골프채, 야구방망이, 아이스하키 스틱 등도 등장하지만 실제 경기나 동작을 보여주기보다는 스위니의 신체를 부각하는 소품처럼 활용됐다.
스위니는 상의를 탈의한 채 농구 골대 위에 앉아 “그들은 오직 스포츠만 보여주길 원했다”는 취지로 말한다. 이후 ‘스포츠’라는 단어를 반복한 뒤 당구대 위에 상의를 탈의한 채 누워 “이건 거래할 수 없다. 난 그냥 여기서 멋져 보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성 스포츠계에서 선수의 신체와 복장을 둘러싼 논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성 선수들은 경기력과 무관한 노출을 요구하는 관행에 맞서 자신이 입을 옷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요구해왔다.
2021년 노르웨이 여자 비치핸드볼 대표팀은 규정이 요구한 비키니 하의 대신 반바지를 입고 경기에 나섰다가 선수 1명당 150유로(약 23만 원), 총 1500유로(약 233만 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같은 해 독일 여자 체조 대표팀은 도쿄올림픽에서 통상적인 하이컷 레오타드 대신 발목까지 덮는 전신 유니타드를 선택하며 스포츠계의 성적 대상화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이 던진 메시지는 경기력과 무관하게 여성 선수의 신체를 부각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선수가 무엇을 입을지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스포츠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작 여성의 신체를 부각한 노빅의 광고에 여성 선수들의 반발이 집중됐다. 광고가 공개되자 선수들은 잇따라 자신의 실제 훈련과 경기 모습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며 ‘여성 스포츠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움직임에 나섰다.
호주의 전 수영 국가대표이자 올림픽 4관왕인 아리안 티트머스는 14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 광고를 보면서 느낀 분노를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며 “자신의 기량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모든 여성 선수는 물론, 팀워크와 우정, 헌신, 탁월함, 단결이라는 스포츠 본연의 가치를 사랑하는 모든 여성을 모욕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여성의 몸을 이용해 돈을 벌고 여성 스포츠를 성적 대상화하는 일이 아직도 존재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시드니 스위니는 더 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 선수들은 광고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훈련과 경기 모습을 공개하며 대응에 나섰다.
영국 단거리 육상 선수이자 유럽선수권 4회 우승자인 에이미 헌트는 13일 육상 대회 ‘얼티밋 챔피언십’ 여자 200m 경기를 마친 뒤 BBC 인터뷰에서 “시드니 스위니, 이게 바로 스포츠를 하는 여성들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헌트는 이날 경기의 우승자 멀리사 제퍼슨 우든이 기록한 21초47을 언급하며 “21초4, 근육, 노력, 피와 땀과 눈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헌트는 “여성이 스포츠를 한다는 것은 항상 예쁘거나 화려한 일이 아니다”며 “분명 언제나 섹시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전 체조선수 그레이시 크레이머가 13일(현지시각)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경기 모습을 담을 영상을 올리며 "이게 바로 스포츠를 하는 여성의 모습"이라고 글을 남겼다. ⓒ그레이시 크레이머 인스타그램 계정
미국 전 체조선수 그레이시 크레이머는 13일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경기 모습을 담은 영상을 올리며 “시드니 스위니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바로 스포츠를 하는 여성의 모습”이라고 적었다. 크레이머는 게시물 설명에도 “정말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상이 확산하면서 세계 각국 여성 선수들이 자신의 실제 훈련과 경기 모습을 보여주는 릴레이가 이어졌다.
호주 여자 수구 대표팀의 2024 파리올림픽 은메달리스트 틸리 컨스는 12일 인스타그램에 경기 영상을 올리며 “도대체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하다”며 “여기 진짜 여성 스포츠 콘텐츠가 있다”고 적었다. 컨스는 스위니의 광고에 대해서도 “정말 싫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호주 단거리 육상선수 브리 리조 역시 자신의 선수 생활을 담은 하이라이트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며 “시드니 스위니에게 정중히 말하자면, 이것이 여성 스포츠의 진짜 모습”이라며 “여성 스포츠에는 외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호주스포츠연구원(AIS)도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릴레이에 동참했다. AIS는 양궁과 체조, 복싱, 소프트볼 선수들의 모습과 여성 스포츠과학 연구 현장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고 “이것이 스포츠”라고 강조했다.
호주 프로복서이자 WBC 밴텀급 세계 챔피언 스카이 니콜슨은 13일 인스타그램에 훈련 영상을 올리며 “이 광고 캠페인이 원했던 관심을 그대로 주고 있는 셈이지만 이런 기업들은 정말 더 잘해야 한다”며 “여성 스포츠를 성적 대상화하는 것을 멈춰라”고 촉구했다.
니콜슨은 “스포츠를 해서 ‘섹시해 보이는 것’과 ‘스포츠’를 팔기 위해 성을 이용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스포츠를 하는 것도 강인한 운동선수이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표현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비판의 대상이 스위니가 아닌 광고를 기획한 노빅이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스위니는 노빅과 사업적 관계를 맺고 있다. 노빅은 스위니가 회사의 ‘전략적 파트너이자 지분 보유자’로 합류했다고 밝혔다.
한편 스위니가 광고 캠페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25년 패션 브랜드 아메리칸 이글의 ‘Sydney Sweeney Has Great Jeans’ 캠페인에 출연해 논란을 빚었다. 당시 광고는 ‘청바지’를 뜻하는 ‘jeans’와 ‘유전자’를 뜻하는 ‘genes’의 발음이 같다는 점을 활용했다. 이를 두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스위니의 외모와 ‘좋은 유전자’를 연결하는 듯한 광고 표현이 우생학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