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가 예멘 후티 반군의 파상공세에 홍해 요충지를 잇달아 내주고 송유관까지 멈춰 세면서 벼랑 끝에 몰렸다.
세계 주요 산유국 중 하나로 막대한 오일머니를 쌓아온 사우디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군사력과 외교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미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안보를 의탁해온 미국마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발을 빼는 모습이어서, 사우디의 고립감은 더 깊어지고 있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로이터=연합뉴스
친이란 성향의 후티 반군은 14일(현지시각) 홍해로 들어가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있는 하니시 제도에 들어가 '그레이터 하니시섬'과 '레서 하니시섬' 모두를 장악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후티 반군은 지난 11일 항구도시 모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 초입의 페림섬을 점령한 데 이어, 사우디 원유 수출의 마지막 보루인 홍해 해상로를 사실상 손에 틀어쥐게 됐다.
사우디, 육로도 해로도 막혔다
올해 2월 말 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하고 이란이 걸프 해역의 핵심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자, 사우디는 아라비아반도를 가로질러 홍해로 빠내는 '동서 송유관'을 통해 우회 수출길을 열었다.
그런데 7월 후티 반군이 2022년 발효된 사실상의 휴전을 깨고 사우디 선박에 대한 해상 봉쇄를 선언하면서 이 우회로마저 위협받기 시작했다.
후티 반군은 9월8일 아람코 계열 시설이 있는 아브하·나즈란·자잔 등 사우디 남부 도시를 미사일과 드론으로 공격해 최소 73명이 다쳤다. 최근에는 친이란 이라크 민병대 소행으로 추정되는 공격으로 사우디 육상 송유관 가동까지 멈췄다.
여기에 후티 반군이 홍해 제도를 잇달아 점령하며 바브엘만데브 해협 통제권까지 확대하자, 사우디는 육로와 해로 양쪽에서 동시에 숨통이 조여든 형국에 놓였다.
AP통신은 이를 두고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에게 '악몽같은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호르무즈 해협과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걸프산 원유의 세계시장 유통을 좌우하는 두 개의 핵심 관문이다. 이 두 통로가 동시에 흔들리면서 국제 유가도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드는 불안정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 EPA=연합뉴스
사우디가 손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는 미국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9월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후티 반군에 대한 미군의 직접 공습을 요청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고, 미국 측은 정보 공유와 표적 정보 제공 수준의 지원만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로이터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현재 사우디에는 약 200명의 미군이 비전투 지원 임무로 주둔 중이지만, 공중급유나 직접 타격 등 실질적 군사작전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소극적 태도에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중동에서 새 전선을 여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국방부 중동정책 고위 관계자를 지낸 댄 샤피로는 필라델피아 매체 인콰이어러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란과 끝없는 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해군력은 과도하게 분산됐고 탄약 재고도 줄어드는 마당에 트럼프가 새 전선을 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놀랍지 않다"며 "사우디로서는 뼈아프게 실망스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닐 퀼리엄 연구원은 중동 경제전문매체 AGBI에 "최근 후티 반군의 세력 확장으로 대응 압박이 커지고 있어 사우디가 대안으로 삼았던 홍해항로는 상업적으로 매력없고 운영상 위험한 곳이 됐다"고 짚었다.
사우디는 그동안 석유부국이라는 지위를 통해 중동지역 패권을 유지해 왔는데 이번 사태로 취약한 안보 기반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추진해 온 탈석유 개혁 프로젝트 '비전 2030' 역시 전쟁의 불똥이 튀며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