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디지털 시대의 사람은 하나를 더 남긴다. 데이터다. 사진과 영상, 이메일과 메신저 대화, SNS 게시물과 목소리까지, 살아 있을 때는 일상의 기록이지만 죽은 뒤에는 ‘디지털 유산’이 된다.
세상을 떠나면 남겨지는 디지털 유산. AI 합성 이미지
그렇다면 이 데이터는 누구의 것일까. 가족은 고인의 SNS 메시지를 볼 수 있을까. 계정은 물려받을 수 있을까. 고인의 목소리와 말투를 인공지능(AI)으로 되살리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까.
남편의 페이스북에 남은 ‘그의 삶의 일부’
호주 공영방송 ABC는 지난 6월28일 남편의 페이스북 계정을 추모 계정으로 바꾸려다 어려움을 겪은 마리야 밀리사블례비치의 사연을 전했다. 그의 남편은 2021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른넷이었다.
밀리사블례비치가 원한 것은 남편이 남긴 사진과 영상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일종의 '추모 계정'이었다. 아내는 사망증명서와 자신이 고인의 가까운 유족임을 입증하는 서류까지 제출했지만 메타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남편은 생전에 사후 계정을 관리할 ‘유산 연락처(legacy contact)’를 지정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은 이용자가 유산 연락처를 미리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사망자의 계정을 추모 계정으로 전환하거나 삭제하는 절차도 안내한다. 다만, 계정을 남겨두는 것과 유족이 그 안의 기록에 접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밀리사블례비치는 ABC에 “아직 남아 있는 그의 일부를 잃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고인의 SNS 계정은 고인의 사진과 말, 시간이 쌓인 ‘그 사람의 일부’일 수 있다.
“죽은 딸의 페이스북을 보여달라” 법정까지 간 부모
누가 고인의 계정을 볼 권리가 있는지를 법정에서 따진 부모도 있었다. 2012년 독일 베를린에서 15세 소녀가 지하철 열차에 치여 숨졌다. 부모는 딸의 죽음에 관한 단서를 찾기 위해 페이스북 계정에 접근하려 했다. 계정은 이미 추모 상태로 전환돼 있었고,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2018년 7월 페이스북 이용계약에서 발생한 권리와 의무도 상속인에게 승계된다고 판단했다. 종이 편지와 일기장이 상속된다면 온라인 메시지를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다고 바라봤다.
페이스북은 이후 1만4천 쪽이 넘는 계정 자료를 PDF로 만들어 부모에게 제공했다. 이에 법원은 2020년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다시 판단했다. 상속인이 고인이 생전에 보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계정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속인이 고인의 계정으로 글을 쓰거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계정 내용을 ‘볼 권리’는 인정했지만 고인을 대신해 계정을 ‘사용할 권리’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디지털 유산을 상속받는 것과 디지털 공간에서 고인을 대신하는 것은 다르다는 얘기다.
천안함에서 제주항공 참사까지, 한국도 같은 질문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는 반복됐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순직 장병 유족들은 고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이메일 등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사망자의 온라인 기록을 유족이 승계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디지털 유산 전반을 아우르는 법제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4년 뒤인 2024년 12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에도 희생자의 온라인 기록을 유족에게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가 다시 문제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한 사람의 계정에는 그 사람의 정보만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메일에는 보낸 사람이 있고 메신저에는 대화 상대가 있다. 고인의 계정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개인정보와 사진, 사적인 대화도 함께 남아 있다. 고인의 기록을 물려받을 권리와 살아 있는 사람의 사생활을 보호할 권리가 맞부딪히는 지점이다.
현재 국내에는 SNS와 이메일 등 디지털 유산 전반의 상속·접근·삭제를 통일적으로 규율하는 명확한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 고인의 온라인 흔적을 지울지 남길지, 누구에게 어디까지 보여줄지는 상당 부분 개별 플랫폼의 약관과 정책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는 생전에 디지털 유언을 남긴다
디지털 유언. AI 합성 이미지
프랑스는 한발 앞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용자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개인정보를 사후에 어떻게 처리할지 지침을 남길 수 있다. 데이터를 보관할지 삭제할지, 특정인에게 전달할지 등을 미리 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디지털 유언’이다. 고인이 별도의 뜻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상속인은 일정한 요건 아래 상속재산 정리에 필요한 정보에 접근하거나 계정 폐쇄 등을 요구할 수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무엇을 유산으로 볼 것인가’다. 음악·영상 같은 ‘디지털 재화’뿐 아니라 ‘가족의 추억에 해당하는 데이터’도 전달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정한다.
디지털 유산이라고 모두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처럼 재산 가치가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가족사진이나 동영상처럼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기록도 있다. 이메일과 메신저에는 고인뿐 아니라 대화 상대방의 정보까지 담겨 있다. 무엇을 상속 대상으로 볼 것인지, 누가 받을 것인지, 유족에게 어느 범위까지 공개할 것인지에 따라 서로 다른 법적 문제가 생기는 이유다.
이처럼 부동산이나 예금과 달리 디지털 유산에는 ‘소유’만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접근’과 ‘삭제’, ‘상속’과 ‘사생활 보호’가 한꺼번에 얽혀 있다.
2100년, 페이스북은 ‘디지털 묘지’가 될까
디지털 묘지. AI 합성 이미지
앞으로 이 문제는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옥스퍼드인터넷연구소(OII) 연구진은 2019년 4월 발표한 연구에서 2018년 이후 페이스북 신규 이용자가 더 이상 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당시 이용자 가운데 약 14억명이 2100년까지 사망할 것으로 추산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소통 공간으로 출발한 SNS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기록을 품은 거대한 ‘디지털 공동묘지’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공지능(AI)은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더 보탠다. 고인이 남긴 문자와 이메일, 음성, 사진과 영상을 AI에 학습시키면 그 사람의 말투로 답하고, 목소리로 말하고, 모습을 닮은 가상의 인물을 만들 수 있다. 이른바 ‘데드봇(deadbot)’이다.
특히 ‘데드봇’을 둘러싼 논란은 유명인의 죽음 이후에도 불거졌다. 미국 컨트리 음악의 전설로 불린 돌리 파튼의 사망 뒤 고인의 모습과 목소리를 AI로 재현하는 문제를 두고 추모와 디지털 복제의 경계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다시 제기됐다. 디지털 유산의 문제가 ‘누가 고인의 기록을 물려받을 것인가’에서 ‘그 기록으로 고인을 다시 만들어도 되는가’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죽은 뒤 내 목소리로 AI가 말한다면
프랑스 정보자유위원회(CNIL)도 지난해 발간한 ‘우리 이후의 데이터’ 보고서에서 고인의 기록을 학습한 대화형 AI를 새로운 사후 데이터 문제로 짚었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정보가 사후 본인의 뜻과 다른 방식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보낸 문자 한 줄이 훗날 자신의 말투를 복제하는 AI의 학습자료가 되고 가족에게 남긴 음성메시지가 자신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재료가 될 수도 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당사자가 허락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부동산은 등기를 넘기고 예금은 상속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한 사람이 평생 온라인에 남긴 사진과 글, 목소리와 대화에는 아직 보편적인 ‘상속 방식’이 없다. 더구나 기술은 이제 흔적을 보관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다시 움직이게 하고, 목소리를 다시 말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에는 유언의 범위도 달라지고 있다. 재산뿐 아니라 사후 어떤 기록을 남기거나 지울지, 나아가 자신의 사진과 목소리 등을 AI로 재현하는 것을 허용할지까지 미리 정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