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약 배송을 둘러싼 논의에서 과거 공유차량서비스 '타다'를 중심에 두고 벌어졌던 논쟁의 그림자가 보인다. 새로운 플랫폼 서비스가 소비자에게 더 편리한 선택지를 줄 수 있는데도 기존 업계의 영역과 이해관계가 앞에 서면 혁신은 쉽게 멈춰선다.
비대면진료와 함께 약 배송 확대 가능성이 거론되자 대한약사회를 중심으로 의약품 오남용과 안전성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다. 안전장치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기존 업계의 영역을 지키는 논리가 새로운 서비스와 소비자의 선택지까지 막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대한약사회 회원들이 9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의약품 배송 확대 추진에 반대하며 시위하고 있다. ⓒ대한약사회
타다 논란이 남긴 교훈도 여기 있다. 새로운 서비스가 기존 산업과 충돌한다고 해서 서비스 자체를 막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면 혁신의 기회도 함께 사라진다. 타다는 기존 택시업계와의 갈등 속에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못했고, 결국 타다 베이직 서비스가 중단됐다. 소비자가 경험했던 새로운 이동 방식도 함께 사라졌다.
플랫폼 혁신은 결국 소비자가 덜 움직이고, 덜 기다리고, 더 쉽게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데서 의미가 생긴다. 음식 배달이 그랬고 장보기와 생필품 배송도 그랬다. 예전에는 직접 가야 했던 일을 앱 하나로 해결하면서 소비자의 시간과 수고가 줄었다. 플랫폼이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을 때마다 소비자의 생활 방식도 조금씩 달라졌다.
약 배송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핵심은 약을 배달하는 플랫폼이 얼마나 많은 시장을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소비자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생기느냐에 있다. 비대면진료를 받은 뒤 약국에 직접 방문하는 대신 필요한 의약품을 배송받을 수 있다면, 시간과 이동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특히 거동이 불편하거나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단순한 배송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지금의 논쟁은 과거 의약분업 때와는 쟁점이 달라졌지만 업계의 영역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점에서는 닮은 구석이 있다. 2000년 의약분업을 앞두고 의사와 약사는 처방과 조제의 역할을 놓고 크게 충돌했다. 26년이 지난 지금 갈등의 무대가 또 달라졌다. 이번에는 ‘누가 처방할 것인가’가 아니라 ‘약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가 쟁점이다.
약 배송을 둘러싼 우려 가운데 안전성 문제는 가볍게 볼 수 없다. 대한약사회는 비대면진료가 반복 처방이나 의약품 오남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문제로 들고 있다. 실제로 한 환자가 짧은 기간 여러 의료기관에서 같은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은 사례도 제시됐다. 처방 기간이 30일, 60일, 90일로 나뉘고 한 건은 600일로 입력된 사례까지 거론됐다.
다만 과다처방을 막는 것과 약 배송을 막는 것은 다른 문제다. 처방 과정에서 중복 처방을 걸러내고, 약사가 처방을 확인하는 절차를 강화하는 것과 의약품을 소비자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를 정하는 것은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배송 과정의 보관 기준이나 본인 확인 등 새로운 서비스에 맞는 안전장치를 촘촘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안전에 문제가 있다면 새로운 서비스를 막기보다 먼저 규칙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순서다. 플랫폼 서비스가 기존 약국의 역할과 충돌한다면 그 역할을 어떻게 조정할지 논의하면 된다. 기존 산업을 보호하는 것과 새로운 서비스를 막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퀵커머스의 성장도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는 음식에서 출발해 장보기와 생필품으로 취급 품목을 넓혀왔다. 소비자는 이제 ‘무엇을 사느냐’뿐 아니라 ‘얼마나 편하게 받을 수 있느냐’를 함께 따진다. 의약품 배송이 허용된다면 플랫폼에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지만, 소비자에게는 새로운 편의가 생기는 셈이다.
물론 약 배송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허용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기존 약국의 역할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처방과 조제 과정의 안전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배송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어떻게 관리할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중요한 것은 이 논의가 기존 업계의 영역을 지키는 데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