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미국 제철소 투자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현대차그룹이 미국 자동차강판 시장의 주요 공급자로 부상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재 현대차그룹이 설계한 미국 제철소의 생산능력은 그룹 내부에서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다. 정 회장이 단지 그룹 내부의 수직계열화를 겨냥해 투자했다기엔 과도한 규모다. 그룹이 소화하고 남는 물량을 현지 완성차 업체에 판매해 미국 철강 공급망 안에서 입지를 확대하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미국 제철소 투자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현대차그룹이 미국 자동차강판 시장의 주요 공급자로 부상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진은 정 회장이 9월4일(현지시각) 미국 루이지애나주 도널슨빌에서 열린 'HPLS(HYUNDAI-POSCO Louisiana Steel) 전기로 제철소 기공식'에서 환영사를 하는 모습. ⓒ현대차그룹
9월7일 철강 및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이 미국 루이지애나 전기로 제철소를 발판으로 현지 완성차 업체를 겨냥한 자동차강판 판매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관세 장벽을 피하려는 방어적 현지화에 그치지 않고 미국 자동차강판 시장의 핵심 공급자로 보폭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현대제철이 올해 4분기부터 루이지애나에 짓기 시작할 HPLS(HYUNDAI-POSCO Louisiana Steel) 전기로 제철소는 연산 270만 톤 규모로, 이 가운데 자동차용이 180만 톤을 차지한다. 반면 현대차그룹의 미국 생산능력은 연 100만 대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통상 자동차 한 대를 만들 때 강판 약 1톤이 들어가는 것으로 본다. 이를 바탕으로 단순 계산하면 그룹이 HPLS에서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은 100만 톤 정도에 불과하다. 남은 80만 톤은 외부 완성차 고객을 끌어들여야 비로소 처리할 수 있는 물량인 셈이다.
마침 제철소가 지어지는 루이지애나 근처에는 GM 텍사스 공장과 폭스바겐 테네시 공장, 혼다 앨라배마 공장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생산기지가 몰려 있다. 거리상 한국에서 수출하는 것보다 물류비 부담이 줄어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현대제철이 글로벌 자동차강판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려는 전략과 맞아떨어진다. 현대제철은 2017년 해외 완성차를 대상으로 자동차강판 판매를 시작한 뒤, 2024년 GM과 포드, 르노 등 25개 브랜드로 공급사를 확대하며 해외 판매가 처음으로 100만 톤을 넘어섰다.
현대제철은 이 물량을 200만 톤까지 늘려 자동차강판 시장에서 글로벌 '톱3'에 오른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루이지애나 제철소는 이 목표를 실현할 현지 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이 9월4일(현지시각) HPLS 기공식에서 내놓은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정 회장은 "관세에 연연하기보다 더 좋은 철강 제품을 여기서 생산해 차량의 품질을 올리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관세 회피가 HPLS 투자의 주요 목적이 아니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는 환영사에서도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강은 현대차그룹은 물론 미국의 자동차 기업들이 차세대 모빌리티를 생산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외부 고객을 명시했고, 이후 "스페이스X나 로켓에도 철강을 공급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자동차를 넘어선 수요처를 확보할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HPLS의 지분구조도 이런 구상을 뒷받침한다. HPLS는 현대제철이 50%, 포스코가 20%를 보유하고 현대차와 기아가 각각 15%씩 출자한 구조로 짜였다.
통상 완성차 업체는 장기 구매계약 형태로 강판을 확보하기 때문에 직접 제철소 지분을 사들이는 형태로 투자하는 것은 흔치 않은 그림이다.
현대차와 기아가 초기 수요를 책임져 가동률을 받쳐주고, 그 위에서 외부 판매를 넓혀가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해석된다. 계열사 물량이 바닥을 깔아주지 않으면 신설 제철소가 초기부터 외부 고객을 상대로 경쟁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은 공급이 모자란 상태여서 파고들 여지도 있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미국의 철강 수요는 9천만 톤을 웃돌지만 조강 생산량은 8190만 톤에 그쳐 매년 2천만 톤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수입 철강 관세가 25%에서 50%로 오르면서 수입산의 가격 경쟁력은 떨어졌다. 현지에서 만들어 파는 쪽이 유리한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HPLS는 현대차그룹 미국 현지화의 마지막 고리이기도 하다. 그룹은 2028년까지 260억 달러(약 36조 원) 규모의 대미 전략투자를 진행하며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 조지아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묶어 연 100만 대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은 최근 HMGMA의 연간 생산능력을 기존 50만 대에서 2028년까지 70만~80만 대 수준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현대차는 미국 판매 차량의 현지 생산 비중을 2024년 약 40%에서 2030년 8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물론 변수는 남아 있다. 관세는 정 회장 말대로 "계속 바뀌어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조건이므로 2029년의 셈법이 지금과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관세 장벽이 낮아지면 현지 생산의 이점도 그만큼 줄어든다.
8조 원 규모 프로젝트에서 지분 50%를 짊어진 현대제철의 부담도 무겁다. 현대제철은 2025년 영업이익 2192억 원을 거두는 데 그치며 2021년 2조4475억 원의 10분의1 수준으로 수익성이 축소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