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의 개인정보 유출 관련 보상안이 나오고, 회사 동료가 농담처럼 한 마디 건넸다. 2만 원이 현금이 아니고 그들의 콘텐츠를 서비스 개념으로 제공한다는 말이 곧장 이어졌지만, ‘보상이 이게 말이 되냐’고 불평을 터트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나는, 우리는 이것을 '큰 이득'이라고 느끼는가.
2만 원은 무엇을 메우는 돈인가. 유출된 것은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이메일이다. 한 번 나간 정보는 회수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값으로 2만 원에 합의한 것인가.
최주희 티빙 대표이사 사장이 3일 열린 티빙 개인정보 유출 사고 관련 사과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허프포스트코리아
기업들의 공통 문법은 이렇다. '실제 피해와 연결됐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기업들의 이 논리는 법정에서 그대로 작동하기도 한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개인정보보호법상 법정손해배상 사건에서, 기업이 정보주체에게 위자료로 배상할 만한 정신적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음을 주장·증명하면 배상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사실 우리는 '2차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쉽지 않다. 특정 회사의 '개인정보 유출'과 우리가 받은 '서울중앙지검 박 검사를 사칭하는 전화'를 연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인정보는 이미 여러 곳에서 흘러나갔다. 최근 사례만 봐도 쿠팡에서, 티빙에서, 롯데카드에서,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에서 빠져나갔다. 어느 쪽에서 유출된 정보가 어느 손에 들어갔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입증 불가능한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제도는, 배상을 '거절하는' 제도나 다름없다.
시선을 20년 전으로 돌려보자. 대학교에 다니던 필자의 친구가 익명의 전화를 받았다. “네 딸을 우리가 데리고 있다. 딸을 살리고 싶으면 돈을 입금해라.”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딸은커녕 여자친구도 없는 평범한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한동안 재미있는 술안줏거리로 소모됐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정확히 우리의 약점과 불안을 겨냥한 서울중앙지검 박 검사의 전화를 받는다. 우리 가족의 목소리와 사진이 AI로 합성되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누구도 이제 보이스피싱을 두고 웃어넘기지 못한다.
20년 전 우리가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악함은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정교함이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개인정보 유출은 이제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기업은 유출을 사건으로 계산하고 대처하지만, 소비자들에게 이미 일상이 됐다. 어제 내가 받은 보이스피싱 전화가 쿠팡의, 티빙을 통해 흘러나간 개인정보를 통해 걸려온 전화라고 입증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우리의 개인정보는 공공재’라고 씁쓸하게 조소하는 국민들의 공포와 체념은 누가 보상하는가. 왜 그것은 ‘피해’로 인정받지 못하는가.
“(개인정보 유출 관련 보상 규모는) 개인당 약 2만 원 정도의 금액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체 규모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추산하는 숫자는 있지만 현재 공개하기 어렵다.” 장현경 티빙 사업관리본부장은 티빙 개인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한 사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여전히 개인정보 유출을 ‘숫자’로 계산한다. 상태는 누구도 계산하지 않는다. 상태는 계산하기가 어렵고, 책임을 귀속시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을, 사회를 정말로 병들게 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상태다.
기업이 "실제 피해와 연결됐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사실 진술이다. 다만 우리가 아무것도 겪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상태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 동료는 “X이득”이라며 웃었다. 필자도 따라 웃었다. 손해를 몰라서가 아니라 셀 방법이 없어서였다. 셀 수 없는 것은 청구할 수 없고, 청구할 수 없는 것은 없었던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