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양대 정보기관인 국가보안국(SBU)과 국방부 정보총국(HUR) 산하 특수부대가 수도 키이우에서 서로 총격전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전쟁 장기화와 내부 갈등이 겹치는 가운데 국가 권력기관마저 무력 충돌을 빚으면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과 국정 장악력을 둘러싼 의문도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심각한 내부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우크라이나 SBU와 HUR 산하 특수부대가 1일(현지시간) 수도 키이우 도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무장 대치 끝에 총격전을 서로 벌이고 있다. ⓒ텔레그램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인 SBU와 HUR 산하 특수부대는 지난 1일(현지시각) 밤부터 2일 새벽까지 수도 키이우 도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총격전을 벌였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이 일제히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3명의 HUR 대원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주민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에는 총격전이 벌어진 아파트 건물 외부에 핏자국이 남아 있는 모습도 담겼다.
SBU와 HUR은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양대 정보기관이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과 함께 설립된 SBU는 국내 방첩 업무를 중심으로 간첩 체포와 테러 방지 등 전통적인 정보기관의 역할을 담당한다. 인원은 약 2만9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다음해인 1992년 창설된 HUR은 해외 및 군사 정보 수집을 주로 맡아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러시아 점령지에서 러시아군 장교를 암살하는 등 각종 비밀 작전을 수행해왔다. SBU보다 훨씬 베일에 싸인 조직으로, 정확한 조직 규모나 인원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두 기관이 무력 충돌까지 벌인 직접적인 계기는 러시아 의용군단(RVC) 부사령관 스테판 카플루노프의 구금과 수사를 둘러싼 갈등으로 보인다. 러시아 의용군단은 우크라이나 편에서 싸우는 러시아 국적자 군조직이다. SBU는 RVC 지도부를 겨냥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테러 시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카플루노프 부사령관과 관련된 압수수색을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HUR은 카플루노프 부사령관이 자기네 작전과 연결된 인물인 만큼 SBU의 구금과 수색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서 이를 막으려 한 것으로 전해졌다. 요컨대 카플루노프 부사령관에 대한 수사와 신병 확보를 두고 두 기관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특정 인물에 대한 수사권과 작전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지만,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내부 권력투쟁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장기화하는 데다 대통령 선거까지 실시되지 않으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약화했고,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정보기관 간 갈등이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다는 평가다.
현재 카플루노프 부사령관은 총격전 이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SBU가 그를 정확히 어떤 혐의로 구금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두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우크라이나에서 총을 쏴야 할 대상은 러시아 점령군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철저한 진상 규명을 지시했지만, 국가 안보의 핵심 축인 두 정보기관이 수도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에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024년 5월 5년의 공식 임기가 끝났지만, 전시 계엄령을 이유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갈등 끝에 물러난 미하일로 페도로우 전 국방장관과 발레리 잘루즈니 주영국 우크라이나 대사 겸 전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등이 젤렌스키 대통령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대통령실 핵심 인사들을 겨냥한 반부패 수사까지 본격화하면서 젤렌스키 정부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 젤렌스키 대통령은 반부패 당국의 압수수색을 받은 핵심 측근 이리나 무드라 대통령실 부실장을 해임했다.
수사 당국은 전직 장관의 보석금 마련 과정에서 340만 달러 규모의 자금 세탁 혐의를 잡고 수사를 진행하면서 대통령실 고위 인사들까지 수사선상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젤렌스키 정부는 서방의 오랜 전쟁 지원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자금을 빼돌려 개별적으로 착복하고 있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에 부패 문제는 내부 권력투쟁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