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이 핵심 조선 계열사 HD현대중공업에서 잇따른 사망사고라는 ‘안전 리스크’와 함께 노조의 파업이라는 ‘노무 리스크’까지 마주하고 있다.
2025년 10월 그룹 총수에 오른 정 회장은 2026년 들어 주력인 조선 부문을 중심으로 역대급 실적을 거두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올해 상반기에만 2조 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올렸다.
다만 주요 조선 사업 계열사인 HD현대중공업에서 안전사고와 함께 파업 전운이 짙어지면서 정 회장의 경영 부담도 커지고 있는 모양새다.
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이 수석부회장이던 2025년 9월4일 전남 영암군 HD현대삼호 조선소를 찾아 주요 생산 설비와 고위험 작업 현장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 ⓒHD현대
9월1일 HD현대중공업에 따르면 최근 발생한 사고와 관련해 사고 경위를 파악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8월28일 오후 8시23분경 울산 동구에 위치한 사내복지시설 한우리회관 보일러 기계실에서 HD현대중공업 협력업체 노동자 1명이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이 노동자는 발견된 뒤 곧바로 병원에 이송됐지만 사망했다. 이어 8월31일 HD현대중공업은 공시를 통해 고용노동부가 사업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A형 사다리 일체 등에 작업중지명령을 내렸다고 알렸다.
이번 사고는 생산 현장이 아닌 사내복지시설 시설 관리 업무(당직 근무) 중에 일어난 사고로 정확한 사망 원인 등을 경찰 및 고용노동부가 조사하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HD현대중공업 노조)는 이번 사망사고가 사측이 2인1조 작업을 묵살해 벌어진 비극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경찰 등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아직 산업안전보건법상 중대재해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다만 노조는 사측의 인력배치 등의 부실이 사고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날을 세웠다.
노조는 8월31일 소식지에서 “이번 사고에서 드러난 근본적 문제는 안전보다 생산과 비용을 앞세워 필요한 인원을 두지 않은 데 있다”며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 명에게 떠맡겨 인건비를 아꼈고 비용 절감의 대가는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이었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4월 잠수함 공장 내 수중함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나온 사망사고, 7월 조선사업부 외업 도크의 곤돌라 및 군산조선소 내 판넬공장에서 잇따라 발생한 끼임 사망사고를 놓고 모두 2인1조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조는 “올해 발생한 잠수함 화재, 곤돌라 끼임, 리치카(러그취부기) 끼임 사고에서도 노동자는 혼자였다”며 “사측은 세 건의 중대재해를 겪고도 근본적 문제인 작업방식을 바로잡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HD현대중공업은 이번 복지시설 사고가 기계실 당직 업무로 산업안전보건법상의 2인1조 의무화 작업 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잠수함 화재, 곤돌라 및 리치카 끼임 사고 등 2026년 발생했던 다른 사망사고 역시 2인1조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사고 원인을 찾는데 힘쓰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정확한 사고 경위 파악을 위해 관계기관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사고의 중대재해 및 2인1조 작업 환경 마련의 당위성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HD현대중공업 사업장 및 복지시설에서 지속해서 사망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는 점은 올해 본격적으로 회장으로서 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기선 회장에게 적지 않은 부담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이 그룹 총수로서 꾸준히 안전을 강조해오고 있지만 사망사고가 잇따른 데다 정부도 감시의 칼날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2025년 12월 HD현대그룹의 새로운 안전 비전을 선포하며 ‘안전 최우선 경영’을 내세웠다. 이어 여러 메시지를 낼 때마다 빼놓지 않고 안전 문제를 강조해오고 있다. 7월24일 올해 세 번째 사망사고가 발생한 뒤에는 ‘안전 셧다운’을 실시하고 대대적으로 안전 체계를 재구축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뒀다.
정 회장은 8월13일 사업 전략 및 세부 로드맵 점검을 위한 HD현대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미래사업을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면서도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안전이 담보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만큼 안전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두고 역량을 집중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는 2025년 중대재해 ‘제로(0’에서 2026년 급격히 사망사고가 늘어난 HD현대중공업을 향한 관리 감독을 대폭 강화했다.
고용노동부는 8월18일부터 HD현대중공업을 대상으로 특별감독에 준하는 고강도 감독에 착수했다. 7월에 일주일 사이 두 건의 끼임 사망사고가 발생한 만큼 모두 62명의 감독반을 투입해 중대재해 핵심 안전수칙 이행 여부를 포함한 산업안전보건법 관련 전반에 관해 집중감독하는 것이다. 또 그동안 사고 뒤 실시된 개선조치 실제 이행 여부 등을 면밀히 살펴본다.
정 회장은 조선업계 호황에 발맞춰 HD현대그룹의 역대급 실적을 이끌고 있지만 ‘안전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룹 지주사 HD현대는 2026년 상반기 연결기준 매출 42조113억 원, 영업이익 6조9594억 원을 거뒀다. 매출은 2025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22% 늘었고 영업이익은 이미 2025년 연간 실적인 6조996억 원을 반기 만에 넘어선 것이다.
HD현대그룹은 3대 핵심 사업축 가운데 정유와 건설기계 부문도 견고한 성과를 내고 있는데 특히 조선 부문의 실적도 역대 최고 수준을 향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2026년 1~6월 연결기준 매출 12조2485억 원, 영업이익 1조9453억 원을 올렸다. 2025년 1~6월과 비교해 매출은 50% 이상, 영업이익은 2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정 회장 체제 원년인 2026년 역대급 실적 확보에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는 노조의 파업도 자리잡고 있다. 2023년부터 매년 파업을 막지 못했는데 2026년에도 노조의 파업을 코앞에 둔 것이다.
HD현대중공업 노사는 6월2일 상견례를 시작으로 3개월여 동안 본교섭 17번을 포함해 지속해서 대화를 이어오고 있지만 현재까지 별다른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노조는 월 기본급 14만9600원(호봉승급분 별도) 및 상여금 100% 인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최근 산업계 화두인 ‘영업이익 N%’ 성과급과 유사하게 영업이익의 최소 30%를 성과로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노조에 따르면 8월27일 제17차 본교섭에서 사측은 ‘영업이익 30% 성과공유’ 요구의 대상이 모든 노동자인지와 불황기 이익이 없을 때도 분배를 요구하는 것인지 물었고 이에 노조는 조선업의 호황 성과는 모든 노동자에게 공유돼야 한다는 점, 임금은 기업의 이익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황기에도 임금 인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답했다.
사측은 아직 제시안을 내놓고 있지 않은 상황인데 대화를 통해 이견을 줄여 잠정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영업이익 30% 성과공유 등에서 양측의 이견이 좁지 않은 만큼 2026년 임단협은 장기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HD현대중공업은 2025년에는 5월20일 상견례 이후 4개월이 지난 9월19일에 임금교섭을 마무리했다. 이 때 노조는 전면파업 4차례, 부분 파업 11차례의 쟁의행위를 진행했다. HD현대중공업에서는 2022년부터 2025년까지 매년 해를 넘기지 않고 당해 임단협을 마쳐왔다.
노조는 9월2일부터 부분 파업에 돌입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어 1일 열릴 제18차 본교섭이 생산차질을 막을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회사는 노사 사이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 교섭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