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유물이 걸어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 분장대회에 심상치 않은 실력자들이 모이고 있다.
한 시민이 국립중앙박물관 분장대회에서 '수줍은 에밀레종'으로 참여하고 있다. ⓒ엑스 계정
3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지난 6월8일부터 7월31일까지 진행된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는 총 275팀이 신청했다. 지난해 온라인 사전 공모에 참여한 83팀과 비교하면 3배가 넘는 규모다.
신청자 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유물을 표현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진지하게 고증에 매달린 참가자가 있는가 하면, 엉뚱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유물을 재해석한 참가자도 눈에 띈다.
맨발로 기둥 뒤에 숨어 수줍게 ‘에밀레종’으로 변신한 참가자도 있다. 그는 지난 1일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에 “국중박 분장대회에 출품했는데 인스타에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심란해진다”며 “난 그냥 결선까지 가서 서울 구경하고 싶은 촌놈일 뿐인데”라고 털어놨다.
팀 이름을 방탑고려단이라 밝힌 이들이 ‘청동 공양탑’으로 변신했다. ⓒ엑스 계정
‘방탑고려단’은 고려시대 유물인 ‘청동 공양탑’을 통째로 무대에 옮겨왔다. 총 3명이 5명의 역할을 맡아 중앙의 여래좌상과 좌우를 지키는 금강역사를 표현했다. 실제 유물은 9층이지만 건물 천장 높이를 고려해 비율을 유지한 6층, 높이 4.3m 규모로 제작했다.
방탑고려단은 7월30일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유물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고증을 참고해 분장과 갑옷까지 세심하게 준비했다”며 “퍼포먼스도 열심히 준비한 만큼, 많은 응원과 호응으로 박물관에서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한 참가자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분장해 자세를 잡아 보이고 있다. ⓒ엑스 계정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분장한 참가자도 등장했다. 한쪽 다리를 다른 무릎 위에 올리고 뺨에 손가락을 살짝 댄 채 사색에 잠긴 모습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학교종이 에밀레’라는 작품도 눈길을 끈다. 세 명의 디자인 전공 대학생은 이번 대회를 위해 말 그대로 도가니(무릎)와 시간을 갈아 넣었다. 오랜 시간 작업에 매달린 이들은 제작 과정에서 “협착증이 오기 직전”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강행군을 이어갔다. 그렇게 온몸을 쏟아부어 완성한 작품을 들고 본선과 결선을 기다리고 있다.
세 명의 참가자가 '학교종이 에밀레'로 분장한 모습을 선보였다. ⓒ엑스 계정
올해 국립박물관 분장대회의 참가 범위도 전국으로 확대됐다. 본선은 9월 첫째·둘째 주말 전국 4개 권역의 거점 국립박물관에서 열린다. 9월5일 국립춘천박물관을 시작으로 6일 국립공주박물관, 12일 국립대구박물관, 13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차례로 본선이 진행된다. 최종 결선은 9월19일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펼쳐진다.
시상 규모도 커졌다. 결선 진출 20팀 가운데 5팀에는 국립중앙박물관장상과 각 3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최우수상 5팀에는 각 100만원, 참가상 10팀에는 각 50만원이 수여된다. 권역별 본선 진출 40팀에도 각 30만원의 참가상이 주어진다.
이처럼 국중박 분장놀이는 참가자가 박물관 유물을 모티프로 직접 분장하고, 무대에서 자신만의 해석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관람객 참여형 문화행사다.
국립중앙박물관 분장대회 일정. ⓒ국립중앙박물관 엑스 계정
무엇보다 ‘유물을 보는 박물관’에서 ‘유물이 되어보는 박물관’으로 경험의 방식 자체를 바꾼다는 데 의미가 있다. 유리장 너머에 있던 유물을 직접 몸으로 표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유물의 생김새와 역사적 배경을 찾아보게 된다. 재미로 시작했지만 대회를 참가하기 위해 유물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학습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분장은 박물관 밖으로 유물을 알리는 역할도 한다. 완성된 작품은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 좋고, 참가자들이 이를 SNS에 공유하면 박물관을 찾지 않은 사람에게도 유물의 모습과 이야기가 전해진다. 박물관에서 본 유물이 SNS에서 공유되는 유물로 확장되는 것이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지난해 분장놀이를 통해 박물관이 청년세대와 한층 가까워졌다는 점을 확인했다”며 “올해는 전국 국립박물관이 함께 만드는 문화축제로 확장되는 만큼 각 지역의 문화유산과 K-뮤지엄의 매력을 더 많은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국중박 분장놀이는 유물을 박물관 안에만 가둬두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문화유산 향유다. 누군가는 청동 공양탑이 되고, 누군가는 반가사유상이 되고, 또 누군가는 에밀레종을 몸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유물은 더 이상 ‘조용히 바라보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누군가의 손과 몸, 상상력을 거쳐 다시 살아난다.
올해 전국에서 모인 275팀이 만들어낼 움직이는 유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박물관의 유물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다시 태어날지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