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호 태풍 '돌핀'이 초강력 '슈퍼태풍'으로 발달할 것으로 예보된 가운데 일본 강진과 유럽 대형 산불까지 세계 곳곳이 극한의 자연재해에 휩싸이고 있다. 하지만 재난이 드러내는 것은 자연의 위력만이 아니다.
자연재해 후 극한 상황은 사람들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AI 이미지.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이웃을 구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혼란을 틈타 범죄와 약탈을 저지른다. 재난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모습과 가장 추한 민낯을 동시에 드러낸다.
스페인·유럽 대형 산불: 농부들이 만든 '생명의 방화선'
마드리드 남서부 나바스델레이에서 진화 작업 중인 스페인군 긴급대응부대. ⓒAFP=연합뉴스
스페인 남부와 중부를 휩쓴 폭염과 산불은 단순한 화재를 넘어 공동체의 힘을 시험하는 재난이 됐다. 지난 24일(현지시각) 스페인 정부는 수도권 인근과 아빌라주를 중심으로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번지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1만 명이 넘는 주민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앞선 20일 과달라하라주에서는 올해 최대 규모의 산불이 닷새째 이어졌고, 낮 최고기온이 44도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보까지 겹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불길보다 빠르게 움직인 것은 지역 주민들의 연대였다. 로이터에 따르면 히헤스 등 산불 피해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트랙터와 물탱크, 살수 장비를 직접 끌고 나와 임시 방화선을 구축하며 소방당국을 도왔다. 갈리시아 지역에서는 고유 품종의 염소와 양, 소를 방목해 마른 덤불을 줄이는 전통적인 산불 예방 방식도 다시 주목받았다. 첨단 장비가 아닌 오랜 삶의 지혜가 재난 대응의 한 축을 담당한 셈이다.
지원은 농민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일부 고립 지역에는 주민들이 식수와 간식, 방진 마스크 등 긴급 물품을 직접 전달했고, 피난민 이동과 교통 통제에도 지역사회가 힘을 보탰다.
LA 대형 화재: 소방관을 가장한 도둑들
캘리포니아주 이튼서 발생한 산불로 불에 타는 민가. ⓒAP=연합뉴스
반대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산불은 재난이 인간의 탐욕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LA 경찰은 2025년 1월12일(현지시각) 산불 피해 지역에서 25명을, 펠리세이즈 산불 지역에서 추가로 4명을 체포했다. 이 가운데 한 용의자는 소방관 재킷과 헬멧까지 착용한 채 화재로 비어 있는 주택에 침입하려다 현장에서 붙잡혀 충격을 안겼다.
이에 LA 경찰청장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범죄는 절도에 그치지 않았다. 로이터는 같은 해 1월 16일 산불 장면을 조작한 AI 생성 영상이 온라인에서 확산하며 실제 구호 활동과 모금 체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FEMA(연방재난관리청) 직원을 사칭한 모금 사기, 가짜 구호 사이트, 유명인을 내세운 딥페이크 모금 페이지 등이 잇따라 적발되면서 피해자들의 절박함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됐다.
주거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갈 곳을 잃은 이재민들이 급히 임시 거처를 찾는 상황을 노려 임대료와 주택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리는 사례까지 보고됐다. 산불은 불길만이 아니라 탐욕과 사기, 시장 왜곡이라는 또 다른 재난까지 불러왔고, 재난 이후 사회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일본 노토반도 지진: 재난마저 정치적 계산의 대상으로
지진 잔해가 남은 일본 노토반도 스즈시. ⓒAFP=연합뉴스
재난은 범죄만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이들의 무감각한 민낯도 드러냈다. 일본에서는 대형 지진 이후 피해 주민들의 상처를 보듬기는커녕 재난을 정치적 성과나 정책 추진의 계기로 바라본 발언들이 잇따르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월 발생해 600명 이상이 숨진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지진이다. 2025년 7월 8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쓰루호 요스케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장은 와카야마현에서 열린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에서 "운이 좋게도 노토에 지진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운'이란 자신과 자민당이 추진해 온 '이중 거점 거주(두 지역 거주)' 정책이 지진을 계기로 탄력을 받게 됐다는 의미였다. 노토반도 지진 피해 주민들이 주소를 원래 지역에 둔 채 가나자와 등지에 임시·정기 거점을 두고 생활할 수 있도록, 두 지역 거주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논의가 진전된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재난을 정책 추진의 호재처럼 표현한 발언은 즉각 거센 역풍을 불렀다. 그는 곧바로 발언을 철회하고 사과했지만, 자민당은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고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이런 사례는 처음이 아니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에도 마쓰모토 류 부흥상은 피해 지역을 찾아 "지혜를 내지 않는 놈은 도와주지 않겠다"고 말해 공분을 샀고, 이마무라 마사히로 부흥상은 "도호쿠여서 다행이다. 수도권이었다면 피해가 훨씬 컸을 것"이라고 발언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난 앞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공감과 책임보다 정치적 계산과 권위적인 태도가 앞섰을 때, 상처 입은 시민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자연재해가 남긴 피해만큼이나 깊을 수 있음을 보여준 장면들이다.
태풍 힌남노: 자신의 생명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한 청년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거세진 파도가 부산 해운대구 마린시티를 덮치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에서는 2022년 태풍 힌남노 당시 발생한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 사고가 극한 상황 속 인간애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2022년 9월6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범람한 물이 순식간에 밀려들자 주민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고립됐다. 그 혼란 속에서 20대 서모씨는 자신의 탈출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먼저 선택했다.
그는 차량에 갇힌 운전자의 문을 열어 탈출을 도왔고, 어르신들의 대피를 끝까지 지원하다 결국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부는 2023년 3월 의사상자심사위원회를 통해 그의 희생을 의사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 사고는 한 청년의 숭고한 희생만으로 기억될 사건은 아니었다. 경보 전달 체계의 미흡함, 대피 판단의 혼선, 시설 관리와 하천 범람 대응 실패가 복합적으로 얽힌 인재(人災)의 성격도 짙었다. 이후 관리자 등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이어졌고, 2024년에는 9명이 기소됐으며 2025년 1심에서는 일부 저수지 관리자들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등 책임 공방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