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최대 3조3천억 원 규모의 SK실트론 인수를 통해 인공지능(AI) 시대를 겨냥한 그룹 사업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실트론은 고용량 메모리 등 첨단 반도체에 사용되는 12인치 웨이퍼 기준 시장점유율 18% 안팎의 글로벌 ‘톱(Top)3’ 기업이다. 두산그룹이 두산 전자BG(반도체 소재), 두산테스나(후공정 테스트)와 함께 반도체 분야를 기반으로 AI 관련 사업 경쟁력을 높여줄 새로운 무기로 평가된다.
SK실트론 인수 규모가 최대 3조 원대에 결정되면서 두산그룹은 기존에 물음표가 붙었던 자금조달 여력도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SK실트론이 AI 반도체 핵심 소재를 담당하는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는 가운데 ‘피지컬 AI’ 사업을 담당할 두산로보틱스 및 AI 데이터센터와 함께 기대받고 있는 두산퓨얼셀의 실적 정상화는 여전히 박 회장의 숙제로 남아 있는 모양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오른쪽)이 박지원 두산그룹 부회장과 2026년 1월7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 현장에서 두산 부스에 전시된 가스터빈 모형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박 회장은 2026년 CES 현장을 찾아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최신 기술 동향을 살피고 사업기회를 모색했다. ⓒ두산
◆ 2.3조에 사온 웨이퍼 3위 SK실트론, 크지 않은 재무부담에 호평
8월3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두산그룹이 SK실트론 인수를 통해 짊어질 재무부담이 무겁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최대 3조3천억 원가량의 자금을 투입해 글로벌 웨이퍼 3위 기업을 인수하게 됐는데 이 규모는 기존에 시장에서 거론되던 금액보다 낮고 두산이 큰 출혈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두산은 SK가 보유한 SK실트론 지분 70.61%를 2조3천억 원에 인수하기로 하는 주식매매계약(SPA)을 7월31일 체결했다. 관계기관의 승인 등을 포함한 남은 절차를 진행한 뒤 2027년 1월31일자로 SK실트론 거래를 마무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두산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SK실트론의 잔여 지분 29.39%도 추가로 사들여 SK실트론을 100% 자회사로 삼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최태원 회장이 지닌 SK실트론 남은 지분은 이번 계약에 견주면 산술적으로 9573억 원가량인데 ‘경영권 프리미엄’이 없어 이보다는 낮은 가격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SK실트론 지분 100%를 사들이는 데 최대 3조3천억 원을 사용하는 셈이다.
이에 SK실트론의 기업가치는 3월 말 기준 순차입금 2조6234억 원을 포함해 6조 원 수준으로 평가됐다. 최근 7조 원까지 언급됐던 것과 비교하면 다소 낮은 수준인 데다 실제 투입되는 지분 인수대금은 두산이 충분히 감내할 만한 자금 규모로 여겨진다.
두산이 보유한 별도기준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6월 말 1조6865억 원에 이른다. 여기에 잔여대출 한도 4천억 원가량과 산업은행이 주선하는 2조5천억 원의 인수금융까지 활용하면 인수대금을 넘어 차입금 상환 재원까지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주형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8월3일 두산 분석보고서에서 “이번 (SK실트론) 인수에 따른 추가 자금조달 부담은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며 “대규모 인수합병(M&A)임에도 추후 유상증자 등을 통해 기존 주주의 가치를 희석할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바라봤다.
두산이 SK실트론을 ‘합리적’ 가격에 인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근 메모리반도체 호황과 함께 높아진 몸값을 조정하는 대신 초과이익 공유(언아웃·Earn-out) 조항을 포함한 것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두산그룹 계열사로서 SK실트론은 2027년부터 2034년까지 연도별 기준 상각전영업이익(EBITDA) 초과분의 40%에 두산의 지분율(70.61%)을 적용해 SK에 공유한다. 또 2026년부터 2029년 6월 말까지 특정 거래처에 관한 특정 품목(4개)의 품질인증을 완료하면 추가 이익을 SK에 지급한다.
권민규 키움증권 연구원은 8월3일 두산의 SK실트론 인수 관련 보고서에서 “EBITDA 초과이익 공유는 초기 인수가격을 낮추는 대신 실제로 실적이 개선될 때만 추가 대금을 지급하는 구조”라며 “품질인증 이익 공유는 신규 고부가 웨이퍼의 인증 성과가 곧 반영될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 AI 투자 타고 재도약 노리는 박정원, 두산로보틱스와 두산퓨얼셀이 남아 있다
박 회장은 AI 시대를 맞아 대대적 변신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두산그룹은 2010년대 후반부터 탈원전·탈석탄 정책에 따라 핵심 계열사인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의 이익 체력이 크게 저하하는 등 그룹 전반이 위기를 맞이했다. 다만 박 회장은 당시 또 다른 핵심이었던 건설기계 계열사 두산인프라코어(현 HD건설기계)를 8500억 원에 매각하는 승부수 등을 통해 빠르게 채권단 관리 체제를 종결한 뒤 사업구조 재편에 나섰다.
현재 두산밥캣이 업황에 따라 변동은 있지만 최근 3개년 연평균 영업이익 9825억 원에서 보이듯 안정적 수익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가운데 두산에너빌리티는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 가스터빈을 중심으로 실적 기여도를 높일 채비를 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 수주잔고는 2023년 말 16조6천억 원에서 2026년 2분기 말 26조4천억 원으로 10조 원 이상 불어났다.
여기에 두산의 자체사업인 전자BG가 주력 제품인 동박적층판(CCL)을 앞세워 AI 사업과 밀접하게 연계한 성과를 대폭 확대하고 있다. CCL은 반도체 패키징에 쓰이는 인쇄회로기판(PCB)의 핵심 소재로 수지, 유리섬유, 충진재, 기타 화학물질로 구성된 절연층에 동박을 적층한 제품이다.
두산 전자BG는 AI 가속기와 고속 네트워크 장비 등에 쓰이는 고부가 CCL 판매를 확대해 2025년 매출 1조8751억 원, 영업이익 4850억 원, 25.9%에 이르는 영업이익률로 역대 최대 실적을 썼다. 2026년에도 매출 2조8천억 원, 20%대 영업이익률로 지속적 성장이 예상된다. 여기에 SK실트론이 또 다른 현금창출원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AI 산업 흐름에 걸맞은 사업구조 재편에 더욱 속도를 내는 셈이다.
김경률 한국기업평가 연구원은 7월31일 두산그룹 평가보고서에서 “AI 모델 개발과 인프라 구축을 둘러싼 투자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관련 산업 전반에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사례로 두산그룹을 주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피지컬 AI 기업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두산로보틱스와 AI 데이터센터의 보완적 전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수소연료전지 기업인 두산퓨얼셀의 반등은 박 회장의 여전한 과제로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두산로보틱스는 주력 사업인 협동로봇 분야의 시장 규모가 중국을 제외하면 8천억 원 수준에 그치는 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 상황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5년 출범 이후 아직까지 연간 영업이익을 한차례도 내지 못했다.
이에 두산로보틱스는 협동로봇에 집중된 사업구조를 탈피하고 AI 기능을 통합한 지능형 로봇 솔루션 기업으로 전환을 꾀하고 2028년에는 산업용 휴머노이드 로봇 제품 출시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2026년 상반기 영업손실을 265억 원 내면서 실적 개선까지는 여전히 시일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인다.
두산퓨얼셀은 수소입찰시장의 경쟁에 따른 판매단가 하락과 시설 확충에 따른 고정비 부담 등이 이어지며 2024년부터 2년 연속으로 영업적자를 피하지 못했다. 2026년 상반기에도 영업손실 522억 원을 냈고 연간 수백억 원대 영업적자가 예상되는 상태다.
두산퓨얼셀의 중장기 돌파구는 데이터센터의 핵심 시장인 미국에서의 사업 확장이 꼽힌다. 특히 기존의 주력인 인산형 연료전지(PAFC)에서 미국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선호도가 높은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로의 전환이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 연구원은 “두산그룹의 중장기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완할 성장 기반으로는 피지컬 AI(두산로보틱스)와 수소연료전지 사업(두산퓨얼셀)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 가운데 두산퓨얼셀을 놓고는 “미국 데이터센터용 제품의 본계약, 추가 수주가 가시화한다면 그룹의 중장기 성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