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일이다. 어렵게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대가 대화의 중심을 다시 자신에게 가져간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한쪽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느낌과 함께 진이 빠지고 조용히 불만이 쌓인다.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화형 나르시시즘'이다.
상대가 꺼낸 이야기를 더 극적이고 흥미로운 자신의 경험으로 되돌리는 행동이 반복되면 대화는 상호 교류가 아닌 일방적 독백으로 변한다. AI 생성 이미지.
부부·가족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임상사회복지사 트레이시 로스는 허프포스트에 "대화형 나르시시즘은 대화의 초점을 계속 자신에게 가져오는 의사소통 습관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거나 중간에 끼어들고,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더 극적이고 흥미로운 자기 경험을 꺼내 '한술 더 뜨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대화는 더 이상 주고받는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자기 이야기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상대에게 일이나 가족, 연애, 살아온 경험 등을 물었는데도 정작 상대는 당신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로스는 "질문은 해놓고 당신이 답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듣지 않거나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신의 말에 동의하고 응원하는 듯하다가도 금세 자신의 경험을 꺼내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대화형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느껴지더라도 이는 임상 진단명이 아니다. 대화형 나르시시스트라고 해서 곧바로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부부·가족치료사 내털리 무어는 "요즘은 누군가의 행동을 이해하려 하거나 함께 해결책을 찾기보다 곧장 나르시시스트라고 낙인찍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넓히고 상대를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누군가가 대화형 나르시시스트가 되거나 그렇게 보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그 행동 뒤에 놓인 요인들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대화를 자꾸 자기중심적으로 이끄는 대표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화형 나르시시즘은 불안과 양육 환경, 자기 인식 부족, 신경다양성 등 서로 다른 배경에서 나타날 수 있으며 곧바로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뜻하지는 않는다. AI 생성 이미지.
불안과 자신감 부족
로스는 "대화형 나르시시즘은 불안과 자신감 부족, 스스로 충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대화의 중심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불편함과 불안을 다스리거나, 상대에게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는 행동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불안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심리치료사이자 '진작 알았더라면! 나르시시스트에게 휘둘리지 않고 죄책감 없이 선을 그으며 단단한 자존감을 만드는 법'의 저자인 첼시 브룩 콜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상황 자체가 불안하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생기는 긴장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대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생기는 침묵과 어색한 흐름을 견디기보다 대화를 장악하는 편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어는 "사회불안이 있는 사람은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부담이 큰 상황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침묵이나 말이 끊기는 순간을 불편해해 생각나는 이야기로 빈틈을 계속 채우기도 한다. 이때 자신이 잘 알거나 관심 있는 주제로 돌아가기 쉬워 겉으로는 대화형 나르시시즘처럼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화형 나르시시즘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될 수 있다.
어린시절 가족의 대화 방식
어린시절 가정에서 배운 대화 방식은 성인이 된 뒤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콜은 "어릴 때 목소리를 높이고 빠르게 말해야만 자기 말을 들어주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인정과 존중을 받기 위해 이런 대화 습관을 갖게 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불안과 트라우마, 자기애적 학대 피해자의 회복을 전문으로 하는 부부·가족치료사 로런 마허는 서로 정반대인 양육 환경이 같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허는 "'아이들은 얌전히 있기만 해야 한다'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도, 자기 말을 들어주게 하려면 더 크고 공격적으로 말해야 했던 가정에서 자란 사람도 대화 중 언제 끼어들고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대화의 미묘한 흐름도 이들에게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상대와 공감대를 만들고 친밀감을 표현하려고 자신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가족 안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습관인 경우도 있다.
로스는 "가족들이 서로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경쟁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들은 상대의 경험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곁을 지켜주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오랜 시간 굳어진 습관일 수 있으며, 이를 고치려면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자신도 모르는 대화 습관
대화형 나르시시즘이 반드시 불안이나 어린시절의 상처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습관일 수 있다.
콜은 "자신이 대화를 독점한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사람도 있다"며 "시간을 들여 노력하면 대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이끄는 습관을 고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로스는 "자기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공감하는 방법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도 있다"며 "상대와 가까워지려는 의도였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대화를 빼앗고 자기 이야기로 돌리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이런 행동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원인 역시 하나로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신경다양성
대화형 나르시시즘처럼 보이는 행동이 모두 자기중심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신호와 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신경학적 방식이 다른 데서 비롯될 수도 있다.
무어는 "최근 심리학계에서는 신경다양성에 관한 이해가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반적인 기준과 차이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영역이 의사소통 방식이다. 자폐 스펙트럼이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있는 사람은 주의를 조절하고 일을 계획·수행하며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뿐 아니라 사회적 신호와 타인의 관점을 읽고 반응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자신의 경험 가운데 의미 있거나 관련 있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상대와 가까워지려는 행동이 겉으로는 대화형 나르시시즘처럼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있으면 생각이 빠르게 전환돼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다.
마허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있는 사람은 집중하기 어렵고 대화 중 머릿속에서 생각이 빠르게 움직여 상대의 말에 끼어들거나 화제를 갑자기 바꿀 수 있다"며 "이런 행동만 보고 상대의 의도를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 자기애적 성향
대화형 나르시시즘은 비교적 사소한 원인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더 큰 문제의 신호일 수도 있다.
로스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는 고착된 자기애적 성향이 반영된 행동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화형 나르시시스트가 실제로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강하게 갈구하는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도 있다.
콜은 "자기애적 성격 구조가 이런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나르시시스트는 이기적이고 특권의식과 과대성이 강하며 타인을 착취한다. 대화형 나르시시즘은 이들이 유일하게 관심을 두는 대상인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마허는 단순한 대화 습관을 넘어 실제 자기애적 성향을 의심할 만한 몇 가지 경고 신호가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가 대화를 관계 형성이 아닌 통제의 기회로만 이용한다면 관여를 줄이고 거리를 두는 것이 자신의 에너지와 정신건강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AI 생성 이미지.
마허는 "대화형 나르시시즘과 함께 상대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태도, 과대성, 자기 과시까지 나타난다면 실제 자기애적인 사람을 상대하고 있을 수 있다"며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지적받았을 때 방어적으로 나오거나 짜증을 내고, 문제를 제기한 당신을 탓하거나 오히려 공감 능력이 없다고 비난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대화 방식에 관한 지적을 받아들이고 행동을 고칠 수 있지만,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작다.
콜은 "이런 행동이 근본적인 자기애적 성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르시시스트를 상대할 때는 적게 관여할수록 낫다. 상대에게 쏟는 에너지를 줄여야 자신의 기운과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조언했다.
콜은 "나르시시스트는 대화를 관계를 맺는 기회가 아니라 상대를 통제할 기회로 이용한다"며 "누군가가 균형 있게 대화할 생각이 없고, 당신의 말을 듣지 않으며, 자신에게 도움이 될 때만 대화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일단 멈추고, 거리를 둔 뒤,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라"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