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보았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참가자들은 대부분 감당할 수 없는 빚의 무게에 짓눌리다 마지막 선택으로 목숨을 건 게임에 뛰어든다. 사업 부도, 투자 실패,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 이자.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직 하나, '죽느냐 사느냐'뿐이다.
화면 속 이야기이니 허구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13년 동안 파산관재인으로 일하면서 드라마 속 인물들과 너무도 닮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감당할 수 없는 빚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현실은 목숨을 건 게임처럼 가혹하다. 그러나 파산과 면책 제도는 완전히 무너진 이들에게 삶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건넨다. AI 이미지.
한때 인기 그룹의 멤버였던 최윤호(가명)씨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내 기억 속 화려했던 그의 젊은 시절과 눈앞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수수한 옷차림과 수척해진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실력 있는 댄서였던 그는 동료들과 그룹을 결성해 데뷔했고, 대표곡이 연달아 히트하며 각종 시상식 무대에 올랐다. 오전에는 라디오, 오후에는 TV, 저녁에는 공연으로 이어지던 숨 가쁜 나날.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았고, 공연장은 늘 팬들로 가득 찼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할 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어요. 팬들의 환호성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죠."
그때를 회상하는 그의 표정에 잠시 행복감이 스쳤다.
그러나 화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기가 저물자 그에게 남은 것은 빚이었다. 솔로로, 또 옛 멤버와 다시 뭉쳐 무대에 서보려 했지만 예전 같은 반향은 없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붙잡은 기회들마저 번번이 어긋났고, 급기야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춤조차 출 수 없게 되자 수입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결국 그는 법정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채권자 명단에는 한때 함께 무대에 섰던 옛 동료의 이름도 있었고, 그 무렵 대인기피증과 공황장애까지 찾아왔다.
두번째 상담 때도 처음과 똑같은 옷을 입고 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증금 몇백만 원짜리 원룸을 전전하는데 그마저 버겁습니다. 정말 막막해요, 변호사님."
연예인이라면 으레 화려하고 풍족하리라 여겼던 나의 짐작이 얼마나 얕았는지 그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빚 앞에서 무너진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정부 중앙 부처를 거쳐 외청장까지 지낸 박철민(가명)씨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 타이틀과 달리 표정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사연은 퇴임을 앞둔 무렵 시작됐다. 그는 "우리 나이에 무슨 부동산 투자냐"며 망설였지만,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에 지인이 소개한 토지 개발에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투자 정보를 건넸던 그 지인이 어느 날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사기였다. 담보로 잡힌 아파트도, 사둔 땅도 헐값에 경매로 넘어갔고 연대보증에 얽힌 아들까지 파산을 신청해야 했다. 평생 나라를 위해 일한 그와 가족은 노후의 문턱에서 주저앉게 된 것이다.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연예인도, 고위 공무원도 예외는 없었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 믿었던 사람의 배신, 예측하지 못한 환경의 변화는 직업과 지위를 가리지 않는다. 화면 밖 현실에서 만난 그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 가족이었다.
드라마는 리모컨을 누르면 끝난다. 하지만 현실의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된다. 다행인 것은,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는 파산과 면책이라는 제도가 있다. 목숨을 걸지 않아도 법이 정한 절차를 통해 누구나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완전히 무너진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파산 제도의 진정한 의미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서던 최윤호씨의 뒷모습을 보며 그 옛날 무대 위의 그를 향해 보냈던 것보다 더 크고 진한 응원을 마음속으로 건넸다. 때로는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믿는다.
글쓴이 왕미양은 변호사로 현재 한국여성리더연합(여성 전문직과 기업인들 연합 단체임)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6년 1월에 제13대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직을 마쳤다. 여성 변호사가 100명 남짓이던 2000년에 법조계에 첫발을 들인 이래, 성남여성의전화 무료 상담을 시작으로 아동·여성·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 활동에 매진해왔다. 2010년부터는 13년 동안 파산관재인으로 2400여 명의 채무자를 만나며 "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2026년, 여성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폭력 피해자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 지원 공로로 '올해의 서울여성상'을 수상했다. 칼럼을 통해 법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