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환 CJ제일제당 대표는 올해 2월 임직원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파괴적 변화와 혁신을 통해 완전히 다른 회사가 돼야 한다"며 생존을 위한 전면적 체질 개선을 선언했다. 이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업은 단호하게 정리하고 승산이 있는 곳에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5개월.
CJ제일제당은 식품·바이오 중심이던 사업 구조를 라이프스타일식품·기술소재·핵심소재로 전면 재편했고, 최근에는 전분당 사업 매각까지 검토하며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CJ제일제당은 PHA 등 스페셜티 바이오 소재를 미래 성장축으로 육성하고 있다. 사진은 윤석환 CJ제일제당 대표와 생분해 플라스틱(PHA) 소재 브랜드 'PHACT'. ⓒ그래픽 허프포스트코리아
29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CJ제일제당은 최근 핵심소재 사업부에 속한 전분당 사업의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최근 재무적투자자(FI)를 대상으로 전분당 사업부 분할 매각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CJ제일제당 측은 "미래 혁신 차원에서 성장성과 수익성이 낮은 한계사업을 정리하기 위한 다양한 옵션을 검토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설명했다.
전분당은 옥수수 전분을 원료로 물엿과 포도당, 과당 등을 생산하는 사업이다. 식품은 물론 제지·철강 등 산업 전반에 공급되는 안정적 B2B(기업 간 거래) 사업이지만 시장 성숙과 경쟁 심화로 성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관심은 전분당 사업 자체보다 ‘왜 지금 이 사업을 정리하려 하느냐’에 쏠린다.
전분당 매각은 개별 사업의 수익성을 이유로 한 구조조정이라기보다 올해 들어 윤 대표가 강조해온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실제 CJ제일제당은 지난 7월 기존 식품·바이오 체계를 라이프스타일식품과 기술소재, 핵심소재 등 3개 부문으로 전면 개편했다. 식품과 바이오라는 사업 구분을 없애고 기술 경쟁력을 기준으로 조직을 다시 짠 것이다. 핵산과 천연조미소재(TnR), PHA 등 고부가 기술사업을 기술소재 부문으로 묶고 범용 소재는 핵심소재로 재편했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는 CJ제일제당만의 선택은 아니다. 라이신과 글루탐산나트륨(MSG), 전분당처럼 규모의 경제가 경쟁력이던 범용 발효·식품 소재는 중국 기업들의 공격적 증설과 가격 경쟁 심화로 수익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이에 글로벌 바이오 기업들은 단순히 많이 생산하는 경쟁에서 벗어나 의료·헬스케어와 기능성 소재, 친환경 바이오 소재 등 기술 기반의 고부가가치(스페셜티) 소재 사업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가장 먼저 보여준 기업이 일본의 아지노모토다.
1909년 세계 최초로 MSG를 상용화한 아지노모토는 오랫동안 세계적 조미료 기업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MSG에 대한 소비자 인식 변화와 일본 식품시장의 성장 둔화 속에서 스스로를 ‘조미료 회사’가 아닌 '아미노산 기술 회사'로 다시 정의했다.
조미료를 만들던 발효 기술의 활용 범위는 의료용 아미노산과 바이오의약품 소재, 기능성 식품을 거쳐 반도체 패키지 기판의 핵심 절연 소재인 ABF(Ajinomoto Build-up Film)까지 확장됐다. AI 반도체 시장 성장과 함께 ABF는 아지노모토의 새로운 캐시카우가 됐고, 시장은 더 이상 이 회사를 식품기업이 아닌 바이오·첨단소재 기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CJ제일제당 역시 세계적 발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라이신과 트립토판 등 사료용 아미노산 생산능력은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핵산과 천연 조미소재(TnR), 생분해 플라스틱 소재(PHA)까지 발효 기술을 기반으로 사업 영역을 꾸준히 넓혀 왔다.
특히 CJ제일제당은 PHA를 상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글로벌 기업 가운데 하나다. PHA는 미생물 발효를 통해 생산되는 생분해 플라스틱으로 대부분의 자연환경에서 분해돼 차세대 친환경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높은 기술 장벽 탓에 상업적 규모의 양산이 가능한 기업은 미국 대니머사이언티픽과 일본 카네카, CJ제일제당 등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힌다.
CJ제일제당은 일반 PHA(scPHA)는 물론 다른 플라스틱과 혼합해 내충격성과 유연성을 높이는 기능성 첨가제용 aPHA(amorphous PHA) 기술까지 확보했다. aPHA는 CJ제일제당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관련 특허와 기술을 단독 보유한 분야기도 하다.
CJ제일제당은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2022년 생분해 소재 브랜드 'PHACT'를 선보인 뒤 메이크업 브랜드 바닐라코의 클렌징밤 용기와 올리브영 상품 포장재, 햇반 종이 용기 코팅 등에 PHA를 적용하며 상용화를 확대하고 있다. 향후에는 국내외에서 식품 포장재와 생활용품, 농업용 멀칭필름, 어망·어구 등으로 적용 분야를 넓혀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유럽바이오플라스틱(EUBP)은 글로벌 PHA 생산능력이 2025년 11만 톤에서 2030년 79만 톤으로 7배가량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TBRC도 관련 시장이 올해 78억9천만 달러(약 11조5800억 원)에서 2029년 149억 달러(약 21조8600억 원)로 2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기술 경쟁력이 곧바로 사업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PHA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다. 생산단가는 기존 범용 플라스틱보다 높고, 시장 확대 역시 친환경 규제와 고객사의 채택 속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글로벌 화학기업과 바이오 기업들의 진입도 잇따르면서 향후에는 원가 경쟁력과 안정적 수요처 확보가 핵심 경쟁력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결국 윤 대표가 선언한 '완전히 다른 회사'의 성패는 전분당을 얼마나 잘 정리했느냐가 아니라,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 아지노모토가 조미료 기업에서 ABF를 앞세운 첨단소재 기업으로 진화했듯, CJ제일제당도 발효기술을 기반으로 PHA를 비롯한 스페셜티 바이오 소재를 새로운 성장 축으로 키울 수 있을지가 '한국의 아지노모토'로 도약할 수 있을지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