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는 사시사철 천막이 걷힐 날이 없다. 여야가 바뀔 때마다 마이크 주인과 현수막의 문구만 바뀔 뿐, "민주주의 회복"이나 "피해자 생존권"이라는 구호는 오늘도 이어진다. 그 좁은 천막 안에서 국회를 향한 국민들의 요구는 매일 뜨겁게 불타오른다.
여야 의원들이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기후위기 특별위원회 구성의 건을 가결 처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여의도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가보면 여름인데도 분위기는 서늘하기만 하다. 치솟는 고물가와 고금리에 신음하며 한숨을 내쉬는 자영업자들에게 여의도의 '투쟁'은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온도차는 단순한 체감이 아니다. 제22대 국회가 임기 반환점을 돌며 내놓은 성적표는 '일 못하는 국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4년 5월 제22대 국회가 출범한 이후 전반기(5월14일 기준) 동안 발의된 법안은 무려 1만8400여 건에 달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본회의 문턱을 넘은 법안은 단 1397건, 실제 원안이나 수정안이 최종 통과된 '순수 가결률'은 고작 7.5%에 불과하다.
비슷한 법안들을 묶어서 처리한 뒤 나머지는 없애버리는 ‘대안반영폐기’를 포함해 통계를 내봐도 제22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바닥을 친다. 19대(15.4%), 20대(13.2%), 21대(11.5%)를 거치며 꾸준히 하락하던 대한민국 국회의 입법 생산성은 22대에 이르러 마침내 한 자릿 수라는 '역대 최악'의 기록을 새로 썼다. 지금의 여의도가 '정치 실종'의 현장임이 숫자로도 명백히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여야가 특검법 발의와 필리버스터, 상임위 보이콧이라는 극단적 대립에 갇혀 쳇바퀴를 도는 사이 1만3천 건이 넘는 법안들은 캐비닛 속에서 먼지만 덮어쓴 채 잠들었다. 그 속에는 소상공인 부채 탕감, 부동산 공급 대책, 보이스피싱 피해자 지원 등 하루가 급한 민생 법안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여야의 극한 대치 속에서 정작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무쟁점 민생 법안’들까지 정쟁의 볼모로 잡혀 숨이 막혀 고사될 위기에 처해있다.
여야 정치인들에게 이 참담한 성적표를 들이밀면 그들은 또 다시 남 탓을 시전할 것이다. “야당을 패싱하는 여당의 오만함 때문이다”, “비쟁점 법안까지 볼모로 잡고 필리버스터를 악용하는 야당 때문 아니겠나”라며 주장할 게 뻔하다. 복잡한 정치적 셈법과 권력투쟁이 작동하는 여의도 전장에서 일하는 그들의 항변은 일견 맞는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에게 여야의 항변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국민이 원하는 건 '싸움'이 아니라 '문제 해결'이다.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라는 격언을 통해 정치가 단순히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해 현실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타협의 기술'이자 '타협의 예술'임을 강조했다.
이제 제22대 국회가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후반기 2년밖에 남지 않았다. 법안 가결률 7.5%라는 성적표를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남은 임기 동안 이를 만회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국회의 존재 가치는 결국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
제22대 국회 후반기를 이끌 조정식 국회의장은 11일 여야 원내대표들과 만난 뒤 페이스북에 "이제 후반기 국회가 시작된 만큼 국민들께 일하는 국회, 민생을 돌보는 국회를 보여드려야 한다"며 "여야가 합의한 비쟁점 법안들이 전반기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했는데 이 법안들도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의사일정을 잘 협의해주시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원들이 매달 받는 세비는 국민의 피땀 어린 세금이다. 하지만 정작 그 세금을 내는 국민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려 각자도생을 강요받고 있다. 이제는 '여의도의 시계'가 아닌, '민생의 시계'를 돌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