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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저희한테는 다들 관심이 없어요. 온통 젠슨 황만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최근 국내 주요 기업의 한 관계자가 건넨 자조 섞인 목소리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한국 산업계가 보여준 풍경을 꽤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방한한 기간 한국 경제의 시선은 온통 그에게 쏠렸다. 재계 총수들은 앞다퉈 협력을 타진했고, 대중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주목했다. 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위대해지려면 고난을 겪어야 한다. 실패는 곧 성장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철학이었지만 대만계 이민자 가정 출신에서 엔비디아라는 기업을 키워낸 그의 스토리와 더해져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예능 프로그램의 평균 시청률은 3~4%였는데 젠슨 황 CEO가 출연한 회사의 시청률은 5.7%까지 치솟았다.

[허프 생각] 엔비디아 젠슨 황 열풍에서 마주한 '수율의 나라' 한국의 역설, 이제는 플랫폼을 설계할 시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6월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엔비디아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최근 며칠 사이 ‘젠슨 황’ 열풍 끝자락에서 그의 발자취를 통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면, ‘하드웨어 vs 소프트웨어’라는 고전의 주도권 경쟁을 지나 게임의 룰을 통제하고 입장권을 발부하는 ‘플랫폼’이 정점에 선 시대에서 한국 산업 생태계는 그러한 인물을, 기업을 품어내고 길러낼 토양을 갖추고 있는가, 위대해질 수 있는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를 묻고 싶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국 산업계를 떠받쳐 온 성공 방정식, 즉 ‘제조업의 문법’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투자의 성격과 자본의 인내심이다. 한국 기업들은 반도체 공장과 배터리 생산기지 같은 대규모 제조 인프라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과감한 투자를 해왔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는 강점이다. 평택 반도체 단지와 고대역폭메모리(HBM) 투자, 대규모 배터리 공장 증설은 그 대표적 사례다.

다만 생산능력 확대나 공정 혁신처럼 투자 성과를 비교적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영역과 플랫폼 생태계 구축처럼 수익화 시점이 불확실한 영역은 성격이 다르다. 오늘날 엔비디아의 경쟁력을 떠받치는 그래픽처리장치(CPU) 전용 AI 프로그래밍 플랫폼 ‘쿠다(CUDA)’ 역시 처음부터 시장의 환영을 받은 기술은 아니었다.

AI 열풍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쿠다는 고성능 컴퓨팅(HPC)과 과학 연구 분야를 중심으로 활용됐지만, 엔비디아는 단기적 수익보다 개발자와 연구자 생태계를 넓히는 데 오랜 시간 투자했다. 눈에 보이는 팹(Fab), 공장이 아닌 무형의 플랫폼을 향한 장기 베팅이었다. 제조업 투자에 익숙한 한국 기업들이 이런 불확실성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는 여전히 남는 질문이다.

둘째는 실패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제조업이 혁신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와 장비 기술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첨단 공정 역시 실패를 딛고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제조업의 문법에서 실패는 궁극적으로 양산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제거해야 할 변수다. 목표는 불량률을 최소화하고 공정을 안정화하는 데 있다. 제조업에서는 완성된 양품의 비율, ‘수율’이 절대적 수치로 제시된다.

반면 플랫폼 산업에서는 제품이 출시 이후에도 실시간으로 수정되고 진화한다. 사용자들의 반응과 피드백이 개발 과정의 일부가 된다. 완성도를 높여 오류를 줄이는 데 강점을 지닌 조직 문화가, 끊임없는 실험과 수정이 요구되는 플랫폼 환경에서는 오히려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셈이다. 제조업의 성공 방정식이 플랫폼 시대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운 이유다.

셋째는 수직계열화의 관성과 플랫폼 설계 능력의 차이다. 한국 대기업들은 소재와 부품, 완성품에 이르는 가치사슬을 내부화하고 압도적 효율성과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 이 전략은 한국 제조업 성공의 핵심 축이었다.

그러나 플랫폼 경쟁의 승자는 모든 것을 직접 만들거나 아래에 두기보다는 수많은 외부 참여자를 끌어들이는 기업인 때가 많다. 엔비디아가 쿠다를 사실상의 글로벌 표준으로 만든 배경에도 개발자와 연구기관, 스타트업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생태계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개방성 자체가 아니라 외부 플레이어들이 참여할 이유를 제공하는 플랫폼 설계 능력이다. 가치사슬을 통제하는 데 익숙한 조직이 생태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지점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제조업의 DNA는 결코 한국 산업 경쟁력의 약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한국 경제를 세계 정상급 제조 강국으로 끌어올린 가장 강력한 성공 방정식이었다. 문제는 그 방정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과 생태계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시대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왜 우리나라에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같은 ‘록스타’가 없을까라는 아쉬움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왜 한국의 뛰어난 제조 역량은 아직 젠슨 황과 엔비디아가 구축한 플랫폼 권력으로 연결되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행스러운 점은 AI 시대가 제조업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로봇 산업까지 AI 경쟁의 기반 역시 결국 제조업 위에 세워진다. 로보틱스 분야를 예로 들면, 젠슨 황 CEO가 마치 로봇 관련 우리 기업들에 시혜를 베푼 것처럼 비치지만, 사실 엔비디아도 현실 세계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AI 기술을 완성하려면 한국의 제조 경쟁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과제는 제조업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 위에 장기 자본의 인내심과 플랫폼 설계 능력, 그리고 실패를 자산으로 축적하는 문화를 어떻게 더할 것인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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