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인근에는 이팝나무꽃이 하얗게 피어 있다. 묘지 진입로를 따라 늘어선 이팝나무는 매년 5월이면 눈처럼 하얀 꽃을 피우며 오월 영령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하얗게 핀 꽃송이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이 나눠 먹던 주먹밥을 연상시킨다는 의미로 함께 언급되며, 서로를 돌보던 오월 공동체의 기억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읽힌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1주일 앞둔 5월11일 광주 북구 국립 5ㆍ18민주묘지 인근에 이팝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다. 광주시는 1994년 5ㆍ18묘지를 조성한 후 이듬해 5월에 주먹밥을 닮은 꽃이 피는 이팝나무를 묘지 진입로에 대대적으로 심었다. ⓒ연합뉴스
우리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교과서 속 몇 줄로 남은 사건이 아니다. 누군가는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 그 시절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었을 고통을 상상하고, 누군가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처음 마주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렇게 5·18은 정치나 이념의 언어보다 사람의 이야기, 공감의 언어로 우리 곁에 다시 다가오고 있다.
때로 영화는 역사의 빈틈을 채워줬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들은 그날을 살아낸 시민들의 삶을 비춘다. 영화 '화려한 휴가'(2007)는 가족과 이웃의 시선으로 당시 광주의 공포와 희생을 담아냈고, 천만 관객 영화 '택시운전사'(2017)는 독일 기자와 서울 택시기사의 시선을 따라가며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광주의 현실을 보여줬다.
다른 작품들은 광주가 남긴 상처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영화 '26년'(2012)은 사건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유가족의 상처를 그렸고, '박하사탕'(2000)은 군사 정권의 국가 폭력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줬다.
'꽃잎'(1996)은 5·18 이후 한 개인에게 남겨진 트라우마와 기억의 조각을 따라가며, 사건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을 응시한다. '아들의 이름으로'(2021)는 국가 폭력의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과 상처를 함께 따라가며, 5·18이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2019)은 시민군 사진 속 이름 없는 한 사람을 추적하며 5·18을 둘러싼 왜곡과 진실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천천히 스며드는 오월의 이야기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2024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꽃여있다. ⓒ연합뉴스
책은 영화보다 조금 더 천천히, 깊은 여운으로 다가온다. 특히 노벨문학상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매년 5월이면 다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국가 폭력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과 상처를 더욱 생생하게 체감하게 한다.
다른 작품들도 꾸준히 독자들의 손에 다시 들리고 있다. '기억의 발굴자'라는 평가를 받는 임철우 작가의 '아버지의 땅'은 5·18 민주화운동 이후 남겨진 죄책감과 기억의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김해원의 '오월의 달리기'는 호랑이 박 코치의 눈을 피해 합숙소 탈출을 감행한 아이들의 시선으로 5·18의 역사를 풀어낸다. 무거운 역사를 청소년들의 이야기로 가까이 끌어오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황석영 작가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한때 '지하의 베스트셀러'로 불릴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시민들의 증언과 현장 기록을 담아낸 대표적인 기록문학으로 오랫동안 5·18의 진실을 세상 밖으로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최정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써낸 '오월의 사회과학'은 '절대공동체'와 '해방 광주'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분석해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 저항의 의미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 책으로 평가받는다.
오월의 기억이 현재가 되는 곳
옛 전남도청(자료사진). ⓒ연합뉴스
무엇보다 올해는 직접 광주를 찾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제4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는 '민주주의 대축제'가 펼쳐진다.
올해 슬로건은 '오월의 꽃, 오늘의 빛'이다. 오월 정신이 과거의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민주주의를 비추는 가치라는 의미를 담았다. 거리 곳곳에서는 전시와 공연, 시민 참여 행사들이 열려 광주 전체가 하나의 기억 공간처럼 바뀔 예정이다.
5월18일 오전 11시에는 국가보훈부 주관으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다. 정부 기념일 지정 이후 5·18민주광장에서 기념식이 열리는 것은 2020년 이후 6년 만이다. 복원을 마친 옛 전남도청도 이날 오후 시민들에게 정식 공개된다.
시민군의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이 다시 문을 열면서, 광주는 오월의 기억을 현재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광주 시민들은 당시 도청을 거점으로 끝까지 항쟁을 이어갔고, 시민군 상황실과 방송실이 꾸려졌던 옛 전남도청은 저항과 연대의 상징이 됐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 작전 속에서도 시민군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속 주인공 모티브가 된 문재학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이곳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5·18을 다시 묻는 이유
2025년 8월8일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의 문재학 열사 묘에 소설책 '소년이 온다'가 놓여 있다. 문 열사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연합뉴스
여전히 5·18을 정치적 프레임으로만 해석하려는 시각은 존재한다. 민희진 오케이레코즈 대표는 지난 12일 전남대학교 강연에서 "5·18 하면 정치랑 연관 짓는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며 "이건 정치가 아니라 역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은 온라인에서도 적지 않은 공감을 얻었다. 과거에는 정치적 공방이 먼저였다면, 지금 세대는 5·18을 우리 사회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적 가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소모적인 논쟁을 넘어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동의 기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장관 후보자를 검증하는 국회 인사청문회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도 5·18은 단순한 과거사 문제로만 다뤄지지 않는다. 오월 정신을 헌법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국가 폭력을 어떤 역사로 규정할 것인지가 반복해서 질문된다. 결국 이는 민주주의와 역사적 진실을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가깝다. 5·18을 특정 진영의 논쟁거리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로 기억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물론 5·18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민의힘은 오월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내용을 담은 개헌안에 반대하며 관련 논의를 무산시킨 바 있다. 그럼에도 영화와 책, 기록과 전시는 계속해서 5·18을 오늘의 이야기로 불러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5·18은 멀리 떨어진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의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