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가 고환율, 고물가, 중동 정세 불안 등 '퍼펙트 스톰'을 맞이하고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이런 상황에서 통화당국의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신 총재는 국제결제은행(BIS) 출신의 거시경제학자로, 당면한 퍼펙트스톰을 뚫고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스테이블 코인' 등 가상자산 논의가 확산되는 '탈중앙화'의 시대에 중앙은행의 새로운 역할을 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생애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낸 데서 기인한 개인적 약점들을 극복하고 시장의 굳건한 신뢰를 얻어내는 것이 '신현송호' 한국은행 연착륙의 핵심 요소로 지목된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발등에 떨어진 불 '금융안정', 극심한 환율 변동성 잠재워야
신 총재는 21일 취임사에서 한국은행의 당면 과제로 △중동전쟁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금융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 마련 △디지털화된 금융환경에서 화폐의 신뢰와 지급결제의 안정성 제고 △우리 경제의 구조개혁 과제 등 네 가지를 꼽았다.
현재 외환시장은 중동 지역의 긴장 고조와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 급변 등이 맞물리며 원·달러 환율이 1400원 후반 대까지 치솟는 등 극심한 변동성에 시달리고 있다.
전임자인 이창용 전 총재 역시 이임사에서 "아직 중동전쟁이 끝나지 않아 외환·금융시장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한 채 자리를 넘기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라며 시장 안정을 최우선으로 당부했다.
과거 'IMF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신 총재가 강조한 대로 신중하고 유연한 단기 통화정책을 통해 물가와 환율을 동시에 통제하는 기민함이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신 총재는 취임사에서 "신중하고 유연한 통화정책 운영을 통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라며 "정책변수 사이 복잡한 상충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정책 수단을 재점검하고, 정부와는 필요한 부분에 대해 정책 공조를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화폐의 위기' 시대, 탈중앙화 맞서 중앙은행의 역할 재정립
현재 퍼펙트스톰을 뚫고 나가는 것이 신 총재의 단기적 과제라면, 신 총재의 한국은행이 짊어진 중장기적 숙제는 '중앙은행의 역할 재정립'이라는 구조적 과제다.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예금 등 탈중앙화 자산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통화 발행'과 '결제 인프라 독점'이라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 총재는 그동안 BIS 국장을 지내면서 스테이블코인이 외환 규제 등을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며 여러 차례 가상 자산을 향한 부정적 견해를 밝혀왔다. 하지만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과거에는 스테이블코인에 부정적이었다"면서도 "통화 생태계 내에서 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할 수 있으며 용도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한 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신 총재는 취임사에서도 "국제화되고 디지털화된 금융환경에서 화폐의 신뢰와 지급결제의 안정성을 지켜내는 것도 중앙은행의 시대적 소임"이라며 "프로젝트 한강 2단계 사업을 통해 CBDC와 예금토큰의 활용도를 높이고, 아고라 프로젝트 등 국제협력을 통해 디지털 지급결제 환경에서도 원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쪽에서는 이와 관련해 BIS 통화경제국장을 지내며 국경 사이 자본 이동과 거시건전성 정책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히는 신 총재의 전문성이 빛을 발할 수 무대라는 평가도 나온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신중론의 핵심은 결국 국가 사이 자본의 이동이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우려"라며 "신 총재가 해당 사안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오고 관련 논문도 여럿 발표한 만큼 적절한 타협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 '해외파 꼬리표' 극복과 전임 총재의 '싱크탱크' 유산 계승
글로벌 역량에 대한 기대감 이면에는 신 총재가 시급히 극복해야 할 약점도 존재한다. 오랜 기간 해외 학계와 국제기구에 몸 담은 탓에 국내 부동산이나 가계부채 등 실물경제 현안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할 수 있다는 '해외파 꼬리표'에 대한 우려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한은 내 부총재 및 금융통화위원들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국내 실물경제와의 간극을 좁히는 융합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아울러 가계부채 조정·안정을 위한 긴축 기조를 유지했고 저출생·고령화 문제에까지 목소리를 높였던 전임 총재의 역할도 이어가야 한다.
이러한 공감대는 이창용 전 총재와 신현송 총재 사이에도 형성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총재는 이임사에서 "통화·금융정책의 울타리를 넘어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가 되어 달라고 신임 총재에게 당부했다. 신 총재 역시 취임사에서 "구조적 요인이 통화정책과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통화정책 운영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한다"라며 "앞으로도 한국은행이 이러한 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정책 제언을 지속함으로써, 우리 경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동안 신 총재가 여러 차례 중앙은행이 외부 금융충격을 선제적으로 포착하고 시스템 리스크를 관리하는 능동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일관되게 보여왔다는 점을 살피면 신 총재가 이끄는 한국은행은 단순한 '금리 조절'의 역할을 넘어 한국 경제의 근간 자체를 설계하고 각종 사안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신 총재는 2022년 9월 열린 G20글로벌 금융 안정 콘퍼런스에서 "(경제위기와 관련해)중앙은행들이 충격을 미리 예측하고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는 방식으로 대응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2021년 BIS 연차총회 연설에서는 "중앙은행은 신뢰의 토대를 제공하고, 민간은 그 토대 위에서 서비스를 만든다"라며 중앙은행의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 소통 전략 변화 주목된다, 약속 이행 통한 시장 신뢰도 관건
시장과 언론을 향한 '소통 전략'의 변화 역시 주요 관전 포인트다. 이 전 총재는 재임 당시 '한국형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하는 등 파격적이고 직접적 소통을 주도해 왔다. 시장에서는 신 총재에게 핵심 변수와 관련된 투명한 공유와 금융통화위원들의 개별적 소통 강화 등을 주문하고 있다.
신 총재 역시 취임사에서 각종 지표들과 관련해 시장과 면밀하게 소통하겠다고 강조했다. 신 총재는 "기존의 틀만으로는 금융시스템의 위험을 충분히 파악하고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라며 "기존의 건전성지표와 함께 시장 가격지표의 움직임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조기경보 기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쪽에서는 신 총재 개인을 향한 신뢰 구축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수장에 대한 굳건한 믿음 없이는 한국은행의 어떠한 정책적 처방도 시장의 온전한 수용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 총재가 청문회 과정에서 제기된 이해상충 우려를 씻어내기 위해 "모든 해외 자산을 처분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떻게 투명하게 이행하느냐가 닻을 올린 신현송호의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일찍부터 정무직 공무원의 길에 뛰어들었던 이 전 총재와 비교해 훨씬 오랜 기간 학계에 몸담아 온 신 총재는 소통 방식이 다를 수 있다"라며 "실용적 매파로 알려진 신 총재가 선제적 긴축이 필요할 때 그 신호를 시장에 어떻게 보내느냐가 금융시장 안정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