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가 예능 제작에 있어 또 다시 '검증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MBC '나 혼자 산다(이하 나혼산)'는 특정 출판사의 '성범죄자 가명 세탁' 논란을 간과한 채 해당 장소를 "유명 만화들을 배출한 출판사"로 홍보까지 했다. 이는 과거부터 이어져 온 프로그램 제작의 사전 검증 부재 문제가 아직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지난 13일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 방송 장면 ⓒMBC
지난 13일 방송된 MBC 나혼산에서는 기안84가 평소 우상으로 삼았던 공포 만화 작가 이토 준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 출판사 소학관(쇼가쿠칸) 본사를 방문하는 장면이 담겼다. 두 사람의 만남은 시청률 6.4%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지만, 배경이 된 소학관을 둘러싼 논란이 뒤늦게 알려지며 시청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소학관은 아동 성범죄 이력이 있는 작가를 가명으로 재데뷔시키고, 편집자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불매 운동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민감한 시기에 지상파 예능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출판사를 '꿈을 이루는 곳'으로 묘사한 점은 시청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여기에 소학관 내부를 비추는 과정에서 전범기 문양 노출 문제로 국내 개봉이 무산됐던 '명탐정 코난' 극장판 포스터까지 그대로 방송에 나와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지난 13일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방송된 장면 ⓒMBC
소학관은 일본 출판계를 장악하고 있는 3대 출판사 가운데 하나로, '도라에몽' '이누야샤' '피구왕 통키' 'H2' '터치' '20세기 소년' 등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명작들을 탄생시킨 '만화계의 성지'다.
특히 소학관은 이름에서부터 '초등학생(소학생)들이 공부하는 책을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어린이 교육과 보호를 기업의 뿌리로 삼아왔던 곳이라 이번 사태에 대한 충격은 더욱 크다.
성범죄자 가명 세탁 논란
2024년 2월 일본 주간지 '주간 문춘' 보도에 따르면, 가해자 야마모토 쇼이치는 미술 교사 시절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10대 제자에게 "데뷔하면 어시스턴트로 써주겠다"며 회유해 약 3~4년간 지속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 소학관은 2020년 해당 작가가 아동 매춘·포르노 금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자 연재를 중단했다. 하지만 2년 뒤인 2022년 새 가명을 만들어 '조인가면'의 원작자로 다시 기용했다.
심지어 민사재판 과정에서 소학관 편집자가 합의 자리에 동석해 피해자에게 약 150만 엔(약 1300만 원)을 제시하며 사건 발설 금지와 연재 재개 방해 금지를 요구한 사실도 보도로 드러났다. 작가 한 명의 일탈이 아닌, 편집부가 조직적으로 나서 피해자를 압박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피해자는 '내가 사랑했던 만화라는 세계가 나를 망가뜨린 사람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가해자의 신작 '조인가면'에서 그림을 담당했던 츠루요시 에리 작가 역시 SNS를 통해 "원작자가 성범죄 전과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편집부로부터 어떤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자신의 그림이 가해자의 복귀 도구로 악용됐음을 깨달은 그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인지하고 사과하며 연재를 중단했다.
지난 9일에 소학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과문 ⓒ소학관 홈페이지
논란이 확산되자 소학관은 지난 9일 "가해자인 야마모토 씨를 다른 필명으로 다시 기용한 것은 여성의 인권을 무시한 행위이며, 회사로서의 관리·감독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변호사의 전화를 통해 피해 여성분께 깊은 사죄의 뜻을 표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현재 연재 중인 해당 작가의 작품을 무기한 중단하고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제3자 위원회를 설치해 사건 경위를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소학관의 '가명 세탁' 논란이 이번에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미성년 성추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액터주'의 글 작가 마츠키 타츠야 또한 가명으로 소학관에서 신작을 연재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 만화가 협회는 이번 사태를 두고 "창작자의 윤리와 플랫폼의 책임이 정면으로 충돌한 중대한 사안"이라며 "표현의 자유가 범죄 은폐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철저한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했다.
방송 이후, MBC 나혼산 제작진은 별도로 해명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논란을 의식한 듯 오티티(OTT,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서는 소학관에 대한 설명과 논란이 된 해당 장면이 삭제됐다. 시청자들은 공적인 영향력을 가진 지상파 방송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기업을 소개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했고, 일본 만화계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큰 사안을 제작진이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제작진의 안일한 태도를 질타했다.
예능에서 반복되는 검증 부재 문제
한국 예능 방송에서 이러한 '검증 부재'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4년 MBC '무한도전'과 SBS '런닝맨'은 방송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거나, 극우 커뮤니티에서 제작한 혐오성 합성 이미지를 내보내 논란이 일었다. 당시 제작진들은 '외주 업체가 제공한 이미지를 제대로 검수하지 못했다'며 사과했지만, 방송 송출과 최종 검수의 책임이 방송사에 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최근 연애 프로그램 방영 이후 출연자의 학폭, 과거 사생활 문제, 혹은 범죄 이력 등이 폭로되어 통편집되거나, 하차하는 등의 논란으로 프로그램 전체가 비판받는 사례도 잦았다. ENA·SBS 플러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는 솔로'에서는 범죄 전과가 있는 출연자가 나와 논란이 있었고, 50대 연예 프로그램 JTBC '끝사랑'에서는 '사기 결혼' 논란이 불거진 출연자 분량이 통편집되기도 했다. 이처럼 방송 제작 현장에서 사전 검증 단계의 필터링이 작동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사한 논란이 반복되는 것은 제작진의 안일한 검증 시스템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