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지난해 글로벌 완성차 시장 판매 2위 폭스바겐그룹을 수익성에서 제치는 등 우수한 이익창출력을 나타내면서 자율주행과 로보틱스 시장을 선점하려는 정 회장 청사진의 동력이 마련되고 있다.
불확실한 대외 경영환경 속에서도 정 회장은 현대차·기아의 리더십 연속성을 유지해 순항하고 있는 완성차사업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기술개발에 끈을 놓지 않는 지속적 투자로 미래 모빌리티 패권을 거머쥐기 위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그룹
16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자율주행과 로봇 시대 퍼스트무버(선도기업)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 확실한 투자가 중요하다는 시각이 나온다. 이는 전기자동차 시장 개화 초기 테슬라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테슬라는 2020년 3차례 증자를 통해 123억 달러(약 17조 원)를 조달했고 가장 먼저 전기차 대량생산에 나서 수익을 창출했다. 테슬라가 전기차 시장의 리더로 인정받게 된 계기다. 이는 자율주행 분야에서도 이어졌다. 테슬라는 자율주행 기술개발 초기인 2019년 모든 차량에 칩과 센서를 장착해 실주행 데이터를 축적하는 선제적 행보를 보였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테슬라가 수익성을 무시하고 전기차 대량생산, 자율주행 데이터 축적 전략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전기차 열풍 초기에 막대한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완성차업체로서 테슬라와 가장 비견되는 기업은 바로 현대차와 기아의 현대차그룹이다. 자율주행과 함께 로봇 기술력에서도 지속해서 시장에 의미 있는 성과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의 사례를 비춰보면 현대차그룹의 시장 입지 확대에 대규모 투자가 필수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정 회장은 완성차 경쟁력을 토대로 든든한 투자체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해 완성차업체 가운데 글로벌 영업이익 2위에 올랐다. 판매량과 매출이 더 큰 폭스바겐그룹을 수익성에서 제친 것이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727만 대를 판매해 3위에 오른 현대차와 기아는 합산 매출 300조3954억 원, 영업이익 20조5460억 원을 기록했다. 글로벌 판매량 898만 대로 2위인 폭스바겐그룹(매출 약 552조 원)의 영업이익 15조3천억 원을 웃돈 것이다.
영업이익률도 6.8%로 글로벌 판매 1위 토요타그룹의 8.6%에 이어 두 번째 자리에 위치했다.
7조 원이 넘는 미국 관세 비용이 발생했음에도 전기차 수요 둔화에 대응해 하이브리드차 생산을 확대하면서 유연하게 대응한 점이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서 현대차그룹이 손꼽히는 수익성을 거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완성차업계 최상위권 수익성을 낸 현대차와 기아는 투자 여력을 한층 키운 것으로 파악된다.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을 포함해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 규모를 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현대차는 120조7774억 원, 기아는 44조4259억 원을 나타냈다. 각각 1년 전보다 4.3%, 6.3% 늘어난 수치다.
다만 현대차그룹의 완성차 사업을 둘러싸고 여전히 변수는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자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등에 업은 중국 전기차 업체의 공세가 거센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 재집권 뒤 미국 관세의 불확실성은 상수가 돼 버린 상황이다.
최근에는 중동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수면 위로 불거지면서 변수가 더 커졌기 때문이다. 김귀연 대신증권 연구원은 “자동차 산업에서 전쟁이라는 중동발 리스크의 핵심은 지속기간”이라며 “전쟁이 장기화하면 에너지 가격 상승, 운임·물류 차질, 금리 인하 지연, 글로벌 경기 위축 등으로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회장은 리더십 측면에서 안정을 꾀하면서 미래를 위한 기술개발 투자는 꾸준히 확대하며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완성차사업의 좋은 흐름을 이어가겠다는 방향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26일 서울 서초구 현대차그룹 본사에서 열리는 제58기 현대차 정기 주주총회에서 집중투표제 배제 문구 삭제,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를 포함해 상법 개정에 발맞춘 안건과 렌터카 사업 진출을 위한 ‘자동차 대여사업’의 사업목적 추가 안건 등을 다룬다. 이 가운데 이번 정기 주총에서는 이사회 구성에 크게 변화가 없을 것이란 것이 특징이다.
우선 지난해 현대차 첫 외국인 대표에 오른 호세 무뇨스 사장이 사내이사로 재선임된다. 무뇨스 사장은 지난해 6월 미국 오토모티브뉴스와 인터뷰에서 하이브리드차 비중을 크게 확대하겠다고 강조하는 등의 전략을 세우며 지난해 현대차의 호실적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정 회장의 신임을 받은 이유로도 꼽힌다.
현대차 이사회는 호세 무뇨스 사장을 두고 “대표이사로서 글로벌 경영환경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글로벌 생산 유연성 확보, 지역별 제품 포트폴리오 최적화 등을 통해 시장 경쟁력 제고, 성과 창출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이승조 재경본부장(CFO) 부사장은 사내이사로, 장승화·최윤희 등 2인도 사외이사로 재선임된다. 유일한 변화는 최영일 국내생산담당·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 부사장이 사내이사에 새로 오르는 것인데 이는 기존 사내이사이자 최 부사장의 전임 이동석 사장이 용퇴하면서 그 자리를 메우는 소폭의 변화다.
기아도 20일 올해 이사회 변화를 주지 않았다. 20일 열리는 제82기 기아 정기 주총에서는 김승준 재경본부장(CFO)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 전찬혁·신재용 등 2인의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이 상정된다.
현대차와 기아는 경영 기조의 연속성을 확보한 가운데 연구개발(R&D) 투자를 지속해서 확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 회장이 올해 신년회에서 역설한 ‘기술 내재화’ 전략이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행으로 옮겨지는 모양새다.
현대차 감사보고서와 기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연구개발에 모두 9조2399억 원을 투입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현대차는 5조5275억 원, 기아는 3조7124억 원을 연구개발 비용으로 집행했다. 2024년과 비교해 현대차는 20.5%, 기아는 14.3% 늘어난 수준이다. 같은 기간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도 현대차(3.0%)는 0.4%포인트, 기아(3.3%)는 0.3%포인트 확대했다.
구체적 세부 투자계획을 내놓은 현대차를 보면 올해 연구개발 투자를 7조4천억 원까지 키우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정 회장은 “자동차시장만 보더라도 제품의 핵심 경쟁력이 AI 능력에 판가름 나는 시대가 됐고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이미 대규모 투자로 이 영역에서 우위를 선점해 온 데 비해 우리가 확보한 역량은 충분하지 않다”며 “다가올 미래에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길은 외부에서 빌려온 기술이 아닌 조직 내부의 생명력으로 받아들이고 체화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