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목 안성기가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타계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애도하고 있는 가운데, 각계 인사들이 생전 고인과 나눈 특별한 인연과 미담을 전하며 추모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배우 안성기(중앙), 김문수 국민의힘 의원(오른쪽). ⓒ연합뉴스
안성기는 지난 5일 오전 9시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혈액암 재발로 투병하던 그는 지난해 12월 30일 심정지 상태로 서울 순천향대학병원 응급실에 이송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DJ와 김문수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거절한 안성기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김문수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안성기와 김대중 전 대통령(DJ) 사이의 인연을 공개했다.
박 의원은 “안성기 선생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특별한 교분을 맺고 있었다”며 “DJ는 그의 연기뿐 아니라 사상과 이념 또한 높이 평가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DJ가 고인을 영입 공천하자며 평소 교분이 있던 제게 지시해 여의도 맨해튼호텔 커피숍에서 자리를 마련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안성기는 “DJ를 존경하고 따르지만, 자신은 영화배우로서 국민께 봉사하고 싶다”며 정중히 고사의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보고를 받은 DJ가 ‘내 생각이 짧았다. 안성기 씨는 배우로 국민께 봉사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의 영입 시도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2008년 당시 김문수 경기도지사 역시 한 행사에서 안성기를 소개하며, 17대 총선 당시 그의 영입을 시도했으나 두 차례나 거절당한 일화를 공개한 바 있다.
김 전 지사는 한나라당 공천위원장 시절 당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안성기의 입당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경기도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직을 제안했을 때도 고인은 이를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기념 영상에 담긴 안성기의 진심
영화 '신과함께'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두 편 모두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를 제작한 리얼라이즈 픽처스의 원동연 대표 역시 안성기와의 인연을 전했다.
원 대표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당시를 떠올리며 “안성기 배우가 가톨릭 문화인들이 제작하는 기념 영상을 만들어달라며 직접 부탁해왔다”고 밝혔다.
당시 원 대표는 스스로를 ‘나이롱 신자’라며 제작을 맡기 어렵다는 뜻을 전했지만, 안성기는 “선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약자와 소외된 사람을 돌보라는 교황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고 싶을 뿐”이라며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원 대표는 영상 제작을 맡게 됐다.
원 대표는 “작업을 마친 뒤 명동성당 뒤뜰에서 안 선배가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우리는 늘 약자와 소외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셨다”며 고인을 향한 깊은 애도를 표했다.
배우·가수·방송인들이 전하는 안성기의 미담
가수 바다(왼쪽), 배우 정보석(중앙), 방송인 박슬기(오른쪽). ⓒ연합뉴스
연예계에서도 배우와 가수, 방송인을 가리지 않고 안성기와 관련된 미담이 이어졌다.
가수 바다는 “항상 ‘우리 바다, 내가 응원해’라며 먼저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시던 선배님”이라며 “함께 미사를 드릴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졌고 큰 행복을 느꼈다”고 추억했다. 그는 결혼 당시 고인이 자택으로 초대해 남편과 자신에게 따뜻한 국수를 대접하며 덕담을 건넸다고도 전했다.
배우 김보성은 “배우 초창기 시절 ‘언제쯤 이 불안이 사라질까요?’라고 여쭤보자 ‘나도 아직 불안하다. 그 불안은 배우라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숙명 아닐까’라고 말씀해주셨다”며 고인을 ‘마음속 큰 스승’으로 기억했다.
방송인 박슬기 역시 리포터 시절 고인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단독 인터뷰 당시 따뜻하게 대해주신 선생님의 온기를 잊을 수 없다”며 “인터뷰에 임하는 진지한 모습에서 ‘내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받은 힘으로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영광이었고 감사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편 일각에서는 안성기의 안장 문제를 두고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현충원 안장 여부가 전직 대통령·국무총리·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등 일정한 직분을 기준으로 결정되는 반면, 선진국에서는 각 분야에서 탁월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라면 계급이나 신분을 초월해 국립묘지에 안장하며 예우를 다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