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는 보험설계사다. 피고인은 보험계약을 체결하고 싶다며 피해자를 집으로 불렀다. 보험계약 체결 후 피고인은 상의를 벗어 가슴과 팔의 상처를 보이며 이 상처가 ‘문신을 지운 상처’이며 자신이 과거에 조폭이었다고 말을 하며 강간을 시도했다. 피해자는 자신이 생리 중이었다고 말했으나 피고인은 피해자를 때릴 듯이 협박하며 피해자를 밀쳐 넘어뜨리고 몸으로 누른 뒤 강간했다. (2011고합827)
재판부는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재판부는 ”피고인을 조직폭력배로 알고 보복이 두려워 신고도 못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가 사건 직후 피고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당 시간 통화를 하였던 사정도 과연 위와 같은 심각한 유형력의 행사가 이루어졌는지를 의심”스럽고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피해자의 즉흥적인 진술 태도 등에 비추어도 피해자가 사실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사건을 판단했다.
그러면서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행위 과정에서 ‘심각한 유형력’이 행사되어야 하는데 피해자 몸에 난 상처가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의 유형력이 행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어떻게 무죄가 되었을까? 형법 제297조는 강간죄를 규정한다. 해당 조문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폭행 또는 협박’을 통해 사람을 강간해야만 유죄가 된다.
이러한 ‘폭행 또는 협박’을 재판부는 ‘유형력’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 유형력에 대해 한결같이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강도죄가 성립할 때 요구되는 유형력과 비슷한 수준이다.
앞선 사건에서의 재판부 설명도 이와 일치한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별로 내키지 않은 상태에서 피고인과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면서도 “피고인이 강간죄의 성립에 필요한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하였다고 보기에는 그 증명이 충분하지 않다”며 이 사건의 피고인을 무죄로 보았다.
그런데 재판부의 다른 판결들을 살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피고인이 동거하던 피해자의 집에서 성관계를 요구하였는데, 피해자가 생리 중이라는 등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피해자에게 성기삽입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자위행위를 하다가 갑자기 피해자의 팔과 함께 몸을 세게 끌어안은 채 가슴으로 피해자의 등을 세게 눌러 움직이지 못하도록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한 뒤 강간한 사건(2016도16948)에 대해 원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뒤집었다. 양팔로 피해자를 세게 끌어안은 채 가슴으로 피해자의 등을 누른 정도를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력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재판부는 피해자를 강제로 눕히는 과정에서는 피해자를 밀어 넘어뜨리거나 뒷덜미를 잡아끄는 행위, 피해자를 피고인의 몸으로 누르고 팔을 잡는 행위, 발로 피해자의 다리를 푸는 행위,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반항하면 죽이겠다는 식의 협박을 하는 경우 등을 유죄로 인정할 증거로 보았다.
즉 재판부가 변화되는 시대를 반영하기 위해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수준의 폭행”을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앞서 ‘유죄의 증거’로 인정된 유형력은 또 다른 판사에 의해서는 ‘무죄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즉 무죄판결과 유죄판결이 각각 근거로 삼고 있는 유형력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런 혼란은 왜 일어나는 걸까? 재판부 일부에서는 ‘심각한 유형력’이 없을 경우에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어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고 판단되면 유죄로 처벌하고 있지만 여전히 법원은 내부기준으로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수준의 폭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확립된 판단기준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법관 개개인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모호한 사법적 해석을 대체할 입법적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바로 ‘비동의 간음’죄이다. 특히 최근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같은 요구는 더욱 강해졌다. ‘폭력’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동의’가 없으면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지난 7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형법상 성폭력범죄의 판단기준 및 개선방안 : 비동의간음죄의 도입가능성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① 폭행·협박의 정도가 상대방의 항거곤란의 정도는 아니었지만 피해자의 동의없이 간음·추행한 경우, ② 항거곤란을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동의가 없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 ③저항의 외적 표시를 남길 여지가 없이 공포심에 짓눌려 당한 경우에 성폭력으로 처벌하지 못하므로 이러한 보호의 흠결을 해결하기 위해 비동의간음죄 신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국회에는 ‘비동의 간음’을 처벌하기 위한 여러 법안이 제출된 상태다. 법안은 ‘비동의간음추행죄’를 신설하는 내용, 기존 조항에 ‘비동의 요건’을 추가하는 내용 등으로 나뉘는 데 이 법안들은 형량 등 일부 내용에서 차이가 나며 대동소이하다.
제303조의2(비동의 간음·추행) ① 동의없이 사람을 간음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동의없이 사람을 추행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천정배 의원안
제297조(강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간음한 사람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 백혜련 의원 안
제297조(강간) 폭행이나 협박 또는 상대방의 동의없이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송희경 의원안
천정배 의원 안에 의하면 비동의간음죄의 형량은 기존 강간죄보다 낮고 업무상 위력간음추행죄보다도 낮다. 형량은 완화되는 대신 기존에 강간죄로 처벌하지 못했던 사례들을 이 죄로 처벌할 수 있게 된다.
가까운 예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을 들 수 있다. 안희정은 물리력 행사는 없지만 지위 차이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으로 기소됐는데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위력을 일반적으로 행사해 왔다거나 이를 남용해 ‘위력의 존재감’ 자체로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고,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 강제력이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비동의 간음죄가 있다면 유죄로 선고할 수 있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했기 때문이다.
비동의간음죄 신설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논문에 따르면 일부학자들은 “비동의간음은 그 형태가 다양하고 불분명하다”든가 ”피해자의 동의 여부가 구성요건이 될 경우 범죄행위자의 처벌 여부가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좌우된다는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비동의간음에 해당하는 행위는 가해남성과 피해여성 사이에 ‘의사소통적 장애’가 발생한 상황이고 의사소통 방식은 곧 문화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형법이 아닌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이에 기반한 자기 결정을 구성해나가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나 “국가형벌권의 과도한 개입은 여성의 성역할 고정관념 내지 가부장적 관념에 근거하여 여성을 과도하게 보호함으로써 여성의 평등한 성적 자기결정권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본다”는 내용 등이 논문에 있다.
여기에 대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반론을 제시했다. 먼저 ‘비동의라는 개념이 불명확하다’는 점에 대해 “이미 형법에는 여러 불명확한 개념이 존재하며 이러한 개념은 해석론과 판례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또 ‘의사소통적 장애가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 국가형벌권이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인 의사소통구조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발적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성관계로 인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현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뿌리 깊은 정조관념에 노출되어 있는 사회에서 비동의간음죄의 처벌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보고서는 우리 형법이 강간을 ‘성기 삽입’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강간과 유사강간의 불법성에 차등을 두어 성기의 성기에 대한 삽입행위와 그외의 삽입행위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정조를 보호법익으로 하는 법체계에 따른 구분”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성기 이외의 신체나 물건에 의한 성기 삽입 역시 성적 자기결정권을 기준으로 한 침해 정도로 볼 때에 불법성에 차이를 둘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로 인한 심리적인 외상이 더 중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성기에 의한 성기 삽입행위보다 낮은 불법성을 설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한편 ‘비동의 간음죄’ 도입과 관련해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형법 개정안은 총 9건이다. 이번 리포트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비동의 간음죄’의 필요성을 따져보고 다른 죄와의 양형을 비교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의뢰한 결과다. 법제사법위원회 송기헌 의원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연구용역 보고서가 나왔으니 소위에서 본격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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