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좌파의 상징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남미 우경화의 흐름 속에서 다시 승리했다. 이번 브라질 대선은 룰라 대통령 혼자의 승리는 아니었다. 그 곁에서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눈 사람들이 있었다.
룰라 대통령은 재선이 확정된 25일(현지시각) 밤 곁에 선 여성 의원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의원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룰라 대통령의 승리를 믿었다는 말이었다. 여성 의원은 트랜스젠더 성소수자였다.
에리카 힐통 브라질 연방하원의원이 25일(현지시각) 룰라 대통령과 대선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해당 영상은 힐통 의원이 공개했다. ⓒ에리카 힐통 엑스
입맞춤을 받은 이는 에리카 힐통 연방하원의원이었다. 브라질 최초의 트랜스젠더 여성 연방하원의원 가운데 한 명이다. 힐통 의원은 브라질 수도 상파울루의 인터콘티넨털 호텔에서 룰라 대통령과 함께 개표를 지켜봤다고 브라질 매체 오 안타고니스타는 전했다. 힐통 의원은 엑스(X·옛 트위터)에 두 사람이 승리를 축하하는 영상을 올리고 "정말 감격스럽다"며 "모든 것이 보람 있었다"고 적었다.
브라질 최고선거법원(TSE)이 26일 발표한 룰라 대통령의 최종 득표율은 유효투표의 51.79%였다. 룰라 대통령은 플라비우 보우소나루 상원의원을 꺾고 사상 첫 네 번째 대통령 임기를 확보했다. 로이터를 비롯한 외신들은 25일 이번 결과를 중남미에서 이어진 우파의 선거 승리에 제동을 건 사건으로 평가했다.
두다 살라베르트 브라질 연방하원의원이 10월27일(현지시각) 룰라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며 엑스에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두다 살라베르트 엑스 계정
브라질의 트랜스젠더 여성 정치인은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당장 4년 전에는 살해 위협에 방탄조끼를 입고 외부 일정을 나서야 했다.
브라질 인터넷 매체 UOL은 2022년 10월2일 두다 살라베르트 당시 연방하원의원 후보가 방탄조끼를 입고 벨루오리존치의 투표소를 찾았다고 보도했다. 경호를 담당한 보안 당국의 요구에 따른 조치였다. 당시 선거운동 기간 모두 9차례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의원실은 전했다. 살라베르트 후보를 어떻게 살해할지 방법을 알려주는 웹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살라베르트 의원은 그해 힐통 의원과 함께 연방하원에 입성했다. 4년 뒤 두 의원은 다시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브라질 공영 통신사 아젠시아 브라질은 지난 5일, 전날 치러진 총선에서 힐통 의원과 살라베르트 의원이 재선에 성공하고 타바타 피멘타 연방하원의원 당선인이 처음 의석을 얻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2027년 문을 여는 연방하원에서는 트랜스젠더 여성 의원 세 명이 함께 활동하게 된다.
힐통 의원에게 쏟아진 표는 특히 눈길을 끈다. 힐통 의원은 상파울루주에서 159만6472표를 얻었다. 브라질 연방하원 선거 사상 여성 후보 최다 득표다. 2022년 첫 당선 당시의 25만6903표와 견주면 약 6.2배에 이른다.
힐통 의원이 정치의 전면에 꺼내놓은 의제 중 하나는 노동자의 쉴 권리였다. UOL의 2025년 2월25일 보도에 따르면, 힐통 의원은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근무 체제를 폐지하기 위한 헌법 개정안을 연방하원에 제출했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누구나 충분히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를 정치의 의제로 끌어올린 셈이다.
살라베르트 의원이 오래 붙들어온 것은 교실과 환경의 문제였다. 살라베르트 의원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 약 20년간 교육 현장에서 일했다. 의정활동의 방향으로는 경제와 교육, 환경을 꼽았다. 광산 개발이 남기는 환경 훼손과 지역의 수자원 문제도 짚었다.
두 의원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았다. 노동자의 휴식과 아이들의 교육, 지역의 환경을 이야기하며 지지의 폭을 넓혀갔다. 성소수자의 삶과 시민의 일상은 그렇게 두 의원의 정치 안에서 만났다.
룰라 정부 안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아젠시아 브라질의 2023년 1월25일 보도에 따르면, 인권운동가 출신 시미 라라트 성소수자 권리 담당 국가비서관은 전날 인권시민권부 산하 해당 직책에 임명됐다. 인권을 요구하던 활동가가 정부 안에서 핵심 지위를 맡게 된 것이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10월27일(현지시각) 브라질 브라질리아의 대통령 관저인 알보라다궁 밖에서 열린 81번째 생일 축하 행사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양손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재선의 기쁨은 생일 축하로도 이어졌다. 룰라 대통령은 27일 81번째 생일을 맞았다. 살라베르트 의원은 엑스에 생일 축하 글을 올리며 "생일은 대통령님의 것이지만, 선물은 우리 브라질 국민이 받았다"고 적었다. 이어 룰라 대통령이 "트럼프와 메타, 보우소나루 가문을 이겼다"고 평가했다.
의회에 자리가 늘었다고 거리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젠시아 브라질은 올해 1월 26일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ANTRA가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해, 2025년 브라질에서 트랜스젠더와 트라베스티에 대한 살해 사건이 80건 기록됐다고 전했다. 해당 보도에 따르면 브라질은 여전히 이들에 대한 살해 사건이 가장 많이 기록되는 나라다.
브라질이 혐오를 극복한 나라는 아니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폭력은 여전하고, 이번 대선에서도 정치적 갈등은 깊었다. 그 속에서도 트랜스젠더 여성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 의회 안의 자리를 넓혔다. 대통령과 함께 선거를 치르고 승리를 나누는 동료 정치인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제 브라질 정치는 한국 정치에도 질문을 던진다. 성소수자의 권리를 말할 때, 정작 당사자는 어디에 서 있는가. 토론의 대상이 되는 자리를 넘어, 법을 만들고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는 얼마나 열려 있는가. 한국에서도 성소수자 인권과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은 오랫동안 이어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대표성과 제도적 보호의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