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글씨체, 배달의 민족 서체, 윈도우 운영체제의 맑은 고딕…. 국내 대표 폰트 기업 '산돌'이 개발하거나 제작에 참여한 글꼴이다.
그런데 아무리 유려한 서체를 개발한다 한들, 무료 글꼴이 넘쳐난다면? 네이버는 '나눔고딕'을 무료 배포하고, 마케팅 차원에서 글꼴을 개발해 푸는 기업들도 있다. 이런 시대에도, 유료 폰트를 만드는 산돌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산돌의 성장세는 계속되는 중이다.
산돌은 지난 16~1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글로벌 타입 콘퍼런스 '산돌 사이시옷 2026'을 개최했다. ⓒ산돌
산돌은 열흘 쯤 전인 지난 16~1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개최한 글로벌 콘퍼런스 '산돌 사이시옷 2026'을 열었다. 디지털 콘텐츠 확산으로 인한 글꼴 산업의 변화, 문자 디자인의 가능성을 짚는 행사였는데, 자연스럽게 산돌의 향후 성장 전략에도 관심이 쏠렸다.
콘퍼런스를 전후로 산돌의 '이례적' 성장에 관한 얘기들부터 업계에 돌았다.
상업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무료 글꼴이 제공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글자 생성 기술까지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글꼴을 유료로 구독해야 하는 폰트 플랫폼 산돌이 오히려 호실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산돌의 2026년 상반기 별도 기준 매출은 80억 원, 영업이익은 32억 원이다. 2025년 상반기보다 매출은 10%, 영업이익은 31% 증가했다.
전 세계 모든 애플 기기에 들어가는 기본 한국어 글꼴 '애플 산돌 고딕 네오'(위)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체제에서 기본 한글 글꼴로 채택된 '맑은 고딕'(아래). 두 글꼴 모두 산돌이 제작에 참여했다. ⓒ산돌
산돌의 실적 개선은 자사 글꼴 구독 서비스 '산돌구름'을 통한 자유로운 글꼴 사용이 주요 견인책으로 꼽힌다.
무료 글꼴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기업과 개인 사용자가 유료 글꼴 서비스를 구독하는 가장 큰 요인은 상업적 이용에 따른 라이선스 관리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하고 완성도 높은 서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무료 글꼴 중에도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글꼴이 많지만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이 글꼴마다 달라 라이선스 관리에 어려움이 따른다. 기업이 소셜미디어(SNS) 광고와 유튜브 영상, 상품 패키지 등 여러 형태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개별 라이선스를 일일이 확인하고 저작권 분쟁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최대 글꼴 기업 모노타입의 작년 9월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조직의 70% 가까이가 글꼴 라이선스의 복잡성으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러한 라이선스 관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산돌은 사용 목적에 따라 복잡하게 세분화됐던 글꼴 라이선스 구분을 통합했다. 인쇄·출판·영상·웹사이트·광고 등 용도별로 나뉘어 있던 200개가량의 라이선스 구분 관행을 폐지한 것이다.
한 무료 폰트의 사용 범위 일람표(라이선스 요약표) 예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고 해서 항상 모든 영역에서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것은 아니다. 빨간 색으로 표시된 영역은 사용 불가 영역이다. 폰트 별로 라이선스 허용 범위가 제각각이어서 기업 및 소비자는 이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눈누
디지털 콘텐츠 제작 확산이 글꼴 수요를 늘리며 산돌의 매출 및 영업이익 상승을 견인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보슨리서치가 발표한 '2026 글로벌 폰트·서체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글꼴 시장 규모는 약 11억9700만 달러(약 1조6천억 원)로 추산됐다. 이 가운데 콘텐츠 제작 분야가 전체 시장의 60%가량을 차지했다.
이처럼 콘텐츠 제작이 글꼴 시장의 주요 수요처로 자리 잡은 가운데 산돌은 고품질 글꼴이 콘텐츠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필수 요소로 바라보고 있다. 특히 최근 AI로 제작된 디지털 콘텐츠가 급증하면서 제목과 자막, 광고 문구 등에 사용될 다양한 글꼴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산돌이 이러한 수요를 흡수했다고 설명했다.
산돌이 제작에 참여한 배달의민족 '을지로체' ⓒ우아한형제들
하지만 AI 시대의 도래가 산돌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AI를 활용한 글꼴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누구나 손쉽게 글꼴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글꼴 제작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며 기존의 유료 글꼴을 구독해야 할 필요성이 약해질 수 있어 산돌은 유료 서비스 경쟁력을 유지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산돌은 AI가 만든 글꼴을 전문 디자이너가 검수 및 보완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신동근 산돌 부사장은 지난 2월 기자간담회에서 AI 도입으로 디자이너가 글자를 일일이 제작하는 대신 기획과 검수에 집중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디자이너의 미적 판단과 품질 관리 역량은 산돌이 AI 생성 글꼴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글꼴 회사가 서체 전반의 조형적 일관성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선 전문적인 디자인 역량이 여전히 필요함을 보여준다. AI는 다양한 글꼴을 빠르게 만들게 해준다. 하지만 서체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과 완성도 높은 서체를 확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또 산돌은 지난 4월 AI를 이용한 콘텐츠 제작 서비스인 '산돌캔버스'를 출시해 콘텐츠 제작, 편집, 글꼴 적용, 라이선스 관리까지 하나의 서비스에서 제공하고 있다.
올해 산돌에 따르면 지난 8월 산돌캔버스 페이지의 일간활성이용자수(DAU)는 3월보다 6.2배 증가했다. 이러한 이용자 증가세는 산돌이 글꼴 판매에 머무르지 않고 콘텐츠 제작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려는 전략이 성과를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돌 관계자는 "생성형 AI 확산으로 콘텐츠 제작이 활발해지고 형태도 다양해지면서 콘텐츠의 완성도와 차별화를 높이는 폰트의 중요성도 커질 것"이라며 "산돌은 폰트와 AI 서비스를 지속 강화해 변화하는 콘텐츠 제작 환경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