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립학교에서 한 해 동안 학생들의 책 접근이 제한된 사례가 약 1만2천 건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집계가 시작된 2021년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가장 많이 금지된 작가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었다. 킹은 2년 연속 미국 공립학교에서 작품이 가장 많이 금지된 작가로 조사됐다. '공포 소설의 거장'으로 알려진 스티븐 킹은 공포와 광기, 트라우마 등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사회를 이야기하는 소설가다.
작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이 2013년 11월13일(현지시각) 파리에서 열린 홍보 투어 중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5일(현지시각)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단체 펜 아메리카(PEN America)가 발표한 '미국에서 금지된 책들(Banned in the USA)' 보고서에 따르면, 2025~2026학년도 미국 공립학교에서 도서 이용이 금지되거나 제한된 사례는 총 1만1982건으로 집계됐다.
영향을 받은 개별 작품은 7370종으로, 이 가운데 4500종 이상이 처음으로 금지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펜 아메리카가 집계하는 '도서 금지'에는 학교도서관이나 교실에서 책을 완전히 제거한 경우뿐 아니라 검토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이용을 중단하거나 학년·연령, 부모 동의 여부 등에 따라 접근을 제한한 경우도 포함된다.
이번에 처음 금지 목록에 오른 작품에는 19세기 고전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Jane Eyre)'부터 일본 만화가 이시다 스이의 '도쿄 구울(Tokyo Ghoul)'까지 포함됐다.
작가별로는 스티븐 킹의 작품 81종이 금지 대상에 올랐으며, 여러 학교와 교육구에서 중복으로 금지된 사례를 합하면 총 312건에 달했다. '샤이닝(The Shining)'과 '그린 마일(The Green Mile)' 등도 대상에 포함됐다.
펜 아메리카는 특정 작품이 금지된 것을 계기로 해당 작가의 다른 작품들까지 연쇄적으로 퇴출 대상이 되는 이른바 '주홍글씨(Scarlet Letter) 효과'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티븐 킹뿐 아니라 사라 J. 마스, 조디 피코, 티파니 D. 잭슨, 앨리스 오스먼, 앤지 토머스와 일본 만화가 오쿠보 아츠시, 이사야마 하지메 등이 이러한 현상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 언급됐다.
개별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금지된 책은 패트리샤 매코믹의 소설 '솔드(Sold)'였다. 인신매매로 성착취를 당하는 13세 네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청소년 소설로, 이번 조사에서 25차례 금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매코믹은 같은 날 공개된 미국도서관협회(ALA) 기관지 '아메리칸 라이브러리즈(American Libraries)'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을 음란물로 규정하는 주장에 반박했다.
그는 "이 책을 음란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책을 위해 인터뷰했던 인신매매 생존자들에게 매우 무례한 일"이라며 "이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운명을 겪지 않도록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사람이 피해를 입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음란물이 아니다"라며 "그것은 그런 피해를 경험한 젊은 독자들에게는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그 밖에 자주 금지 대상이 된 작품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 성폭력을 경험한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로리 홀스 앤더슨의 '스피크(Speak)', 약물 중독을 소재로 한 엘런 홉킨스의 '크랭크(Crank)' 등이 포함됐다.
펜 아메리카에 따르면 2025~2026학년도 텍사스에서는 8100건이 넘는 도서 금지 사례가 집계됐다. 펜 아메리카는 특히 학교 도서관의 장서 선정 기준을 강화하고 학부모의 도서 이의 제기 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의 텍사스주 상원법안 13(SB 13)을 비롯한 주 차원의 법률과 조직적인 단체 활동, 정치권의 압력 등이 학생들의 도서 접근을 제한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펜 아메리카는 인공지능(AI)이 도서 퇴출 여부를 가리는 데까지 활용되고 있는 현실에도 주목했다. 일부 교육구 관리자들이 도서의 퇴출 여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생성형 AI를 이용하고 있으며, AI가 책의 구체적인 맥락이나 법적 기준보다 다른 교육구에서 이미 금지된 전력을 근거로 퇴출을 권고하는 사례도 확인됐다.
또한 최근 인기가 높아진 일본 만화(망가)를 중심으로 그래픽 소설에 대한 금지가 확산하고 있으며, 특히 성적 표현이나 폭력, 성 정체성을 묘사한 일부 장면을 작품 전체의 맥락에서 떼어내 문제 삼는 이른바 '맥락 제거(context stripping)'가 도서 금지의 주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됐다.
펜 아메리카는 "학교 도서관은 지식과 사상을 접할 수 있게 하고, 개인적 또는 정치적 이념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책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며 "도서 금지는 읽을 자유를 침해하고 학생들이 접할 가치가 있는 다양한 견해와 목소리, 관점과 문학에 접근할 기회를 차단한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사회·제도적 맥락은 다르지만, 국내에서도 학교·공공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비치하고 이용하게 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잇따르고 있다.
2024년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에서는 2023년 3월부터 2024년 2월까지 일부 단체가 유해성을 주장한 성교육·성평등 관련 도서 2528권이 학교도서관에서 폐기돼 '도서 검열' 논란이 일었다.
2025년에는 이른바 '리박스쿨' 강사 교육에 교재로 활용된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가 전국 623개 초·중·고 학교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역사·정치적 편향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일부 교육청은 관련 도서의 이용 제한이나 폐기 절차에 나섰다.
올해 5월에는 인천 지역 도서관 27곳에서 5·18 민주화운동 역사 왜곡 논란이 제기된 도서 65권이 확인됐다. 이에 일부 도서관은 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해당 도서를 어린이·청소년실에서 일반자료실로 옮기거나 대출 절차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처럼 도서의 선정과 폐기, 이용 제한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면서 학교도서관에서 전문적 판단을 담당할 인력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학교도서관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사서교사 등 전문 인력을 확대·배치하는 정책이 추진돼 왔다. 교육부의 학교도서관 정책에 따라 사서교사 정원은 2019년 962명에서 2024년 1618명으로 늘었다. 일부 교육청에서는 정원 외 기간제 사서교사 등을 활용해 학교도서관 전담 인력 배치를 확대하는 사업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