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의 제작이 중단된 가운데, 당초 각본에는 실제 사건과 전혀 다른 '한국인 히트맨'이 진범으로 등장하는 파격적인 설정이 담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일본 사회의 '혐한'이 만화와 온라인 콘텐츠 등에서 오래동안 이어져 온 사실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의 혐오 표현은 최근 SNS·만화 등에서 두드러진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일본 매체 '현대비즈니스'는 15일(현지시각) 연예계 관계자를 인용해 아베 전 총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의 제작이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이 작품은 2022년 7월8일 발생한 아베 전 총리 암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실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개된 각본에 따르면 영화에서 총격범은 실제 범인인 야마가미 데쓰야를 연상시키는 인물로 설정됐지만, 사건의 진짜 범인은 따로 있었다. 야마가미에 해당하는 인물은 진범에게 시선을 돌리기 위한 '희생양' 역할이었으며, 현직 총리를 눈엣가시로 여긴 한 종교단체가 암살을 계획하고 암살자를 보냈다는 내용이 뼈대를 이룬다.
특히 각본에서 최종 진범은 '한국인 실력파 히트맨'으로 설정됐다. 실제 사건의 범행 동기와 전혀 다른 허구의 배후와 국적을 부여한 셈이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암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배우 스다 마사키(왼쪽).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2022년 7월8일 서부 나라현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에 나섰다 총격을 받고 쓰러져 있다. ⓒ탑코트(TOPCOAT) 공식 홈페이지, 로이터=연합뉴스
이 작품에는 일본의 인기 배우 스다 마사키가 진범 야마가미 데쓰에 해당하는 역할로 출연할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출연설이 사실과 다르다는 보도가 나왔고, 작품 자체도 제작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자에 따르면 제작진은 올해 7월 캐스팅 작업을 진행했으며, 당초 10월 촬영에 들어가 2028년 개봉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처럼 많은 사람이 접하는 대중 영화에 '혐한 정서'를 노골적으로 녹여낸 것은 이례적이다. 다만 일본의 각종 미디어에서는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혐한 정서를 드러내는 사례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대표적 사례로 일본 만화 '태권더 박'이 꼽힌다. 2007년 일본의 만화 잡지 스레드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한국 최강의 태권도 선수 '박'이 자신의 도장을 무너뜨린 일본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한국인을 괴롭히는 일본인들과 맞서는 내용을 기본 줄거리로 삼는다. 겉으로는 한국인 주인공이 일본인에 맞서는 구조지만, 작품 곳곳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희화화하거나 조롱하는 장면이 등장해 논란이 됐다.
만화 '태권더 박' 중 故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한 장면. ⓒ온라인 커뮤니티
특히 작품에 등장하는 한국인 씨름 선수 '오무현'은 이름과 외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그려졌다. 극 중에서는 '암애투신살'이라는 기술을 맞아 두개골이 파열돼 사망하는 장면이 등장해 고인의 죽음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국내에서도 이 만화가 한국과 전·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점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2005년 등장한 야마노 샤린의 '혐한류'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혐한류'는 재일 한국인을 두고 '일본을 침략해 영구 거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집단'처럼 묘사했다. 여기에 한국의 성범죄를 일반화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강한 반한 정서를 담았다. 또 안중근 의사 등 독립운동가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했고, 한글의 역사와 관련해 왜곡된 주장을 담았다. 2009년 '혐한류4' 출간 당시에도 이 같은 내용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만화 '혐한류' 표지. ⓒ연합뉴스
당시 '혐한류'는 흥행에도 성공했다. '혐한류'는 발매 5일 만에 누적 판매량 10만 부를 기록하며 당시 일본 사회에서 확산된 반한 담론을 상징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됐다.
현재 일본 사회에서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혐한은 줄었을 뿐, 그 잔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혐한 정서는 시대 변화에 따라 거리 시위에서 만화와 영상, SNS와 온라인 게시판 등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가며 다른 형태로 남아 있다.
2016년 6월3일 일본에서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 해소법이 시행된 이후 거리에서 벌어지는 과격한 혐오 시위는 감소하는 흐름을 보여왔다. 일본 법무성 역시 법 시행 10년을 맞아 거리의 과격한 시위가 감소하는 등 일정한 변화가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인터넷에서는 차별적 표현이 계속되고 있으며, 혐오 표현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일본 법무성의 실태조사에서는 혐오 표현을 접한 장소로 인터넷을 꼽은 비율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성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조사에서 34.4%였던 인터넷 응답은 2024년 65.5%로 높아졌다. 반면 거리 선전이나 시위 등 오프라인 공간에서 접했다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결국 과거의 혐한이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방식으로 눈에 띄었다면, 최근에는 만화·영상·SNS·온라인 게시판 등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콘텐트 속에 보다 작게 스며드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일본 법무성은 2025년 6월18일 일본 정부홍보온라인(政府広報オンライン)을 통헤 혐오 표현이 거리 시위 중심에서 SNS와 게시판 등 인터넷상의 표현으로 다양화됐다고 설명했다.
2026년 7월17일부터 7월21일까지 국제문화회관과 동아시아연구원이 일본인 15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일 공동 여론조사에서 한국에 대해 '좋다' 또는 '좋은 편이다'라고 답한 비율은 35.3%로, 지난해 24.8%보다 10.5%포인트 상승했다. 다만 '좋지 않다' 또는 '좋지 않은 편이다'라는 응답은 44.1%로 여전히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