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한복판에 아이 모습을 한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모으고 있다. 누구를 향해, 무엇에 대해 사죄하고 있는 것일까.
9월10일(현지시각)부터 독일 베를린에서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5)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은 그의 '무릎 꿇은 히틀러' 작품. ⓒ 노이에 내셔널갤러리
10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의 노이에 국립미술관에서 이탈리아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5)의 대규모 개인전이 시작됐다.
'밤(Night)'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전시에서 '무릎 꿇은 히틀러' 작품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카텔란이 2004년에 처음 선보인 '그(Him)'라는 작품인데, 어린아이의 몸이 된 히틀러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모으며 어디론가 사죄하고 있는 형상이다.
1미터 남짓한 높이의 조각상은 뒤에서 보면 영락 없는 어린 아이지만 앞에서 보면 중년의 얼굴을 한 히틀러의 모습이다. 순수한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조각상은 관람객의 용서를 유도하지만 동시에 아돌프 히틀러를 용서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듯하다.
이탈리아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5)의 조각상 '그(Him)'은 뒤에서 보면 어린 아이의 모습이지만 앞에선 아돌프 히틀러임을 알 수 있다. ⓒEPA=연합뉴스
20년도 더 된 작품을 왜 지금, 하필 독일에서 다시 선보이는 걸까.
이 '무릎 꿇은 히틀러' 조각상이 독일에 등장한 건 독일 작센안할트 주의회 선거에서 독일의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4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거에 압승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카텔란은 10일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나치당 이후 독일 내 극우주의의 부활을 두고 "불과 몇 시간 만에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독일뿐 아니라 유럽에서의 극우 정당 지지세가 올라가는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불확실성 속에서 권위를 갈망한다"며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자유주의적 특권을 기꺼이 포기한다"고 지적했다.
'무릎 꿇은 히틀러'를 단순히 역사적 인물을 재현하거나 거대 악을 희화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카텔란은 해당 작품을 통해 단순히 독일의 문제를 넘어선 '권력과 권위주의'라는 보편적 문제에 질문을 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극우 세력이 다시 힘을 얻고 있는 유럽의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파시즘은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히틀러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문 당하는 여성을 나타낸 작품 '새벽(Dawn)'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 ⓒ노이에 내셔널갤러리
앞서 카텔란은 2012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지역에 '무릎 꿇은 히틀러'를 전시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게토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인 강제 거주 구역으로써 약 45만 명이 수용되어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장소다.
바르샤바의 '무릎 꿇은 히틀러'는 1970년 12월7일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를 떠올리게 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작가 밀젠코 제르고비치는 이를 두고 2021년 10월14일 폴란드의 예술 평론 잡지 헤리토를 통해 "카텔란의 히틀러가 바르샤바에 오기 전에는 (빌리) 브란트를 떠올리기 어려웠지만, 바르샤바에 오면서 두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고 전했다.
서독의 제4대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는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방문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당시 총리가 직접 무릎을 꿇으며 사죄한 것인데, 독일의 과거사 참회의 진정성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브판트 총리는 동서냉전 시대 평화공존을 위한 동방정책의 초석을 쌓았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자료/연합뉴스
이와 별도로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여러 논쟁적 작품을 통해 현대미술이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지 질문을 제기한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대표작 '코미디언(Comedian)'은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것이 전부이다. 2019년에 이 작품이 공개되면서 '어디까지가 예술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미국의 행위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는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벽에 붙은 바나나를 먹어치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문제 삼지 았았고 전시 관계자는 곧바로 다른 바나나로 교체했다. 이후 해당 작품은 미술품 경매에서 620만 달러(약 87억 원)에 거래되며 더욱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2023년 1월부터 7월까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개인전이 열렸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우리(WE)'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진행됐다. 사진은 카텔란의 대표작 '코미디언(Comedian)' ⓒ허프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