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순국을 불과 며칠 앞두고 남긴 여덟 글자의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이 일본에서 돌아와 116년 만에 고국에서 처음 공개됐다. 국제법과 정의를 믿었지만, 결국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던 안 의사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글씨다.
2026년 3월26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의사 순국 116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왼쪽), 8월13일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공개된 안중근 의사 유묵 '만국공법불여대포'의 모습이다(가운데), 8월13일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유묵 만국공법불여대포' 언론공개회에서 관계자가 유묵의 뒷면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유산청은 광복절을 앞둔 13일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에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함께 일본에서 환수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 ‘만국공법불여대포(萬國公法不如大砲)’를 언론에 최초로 공개했다.
‘만국공법불여대포’는 말 그대로 “국제법이 대포만 못하다”는 뜻이다. 19세기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국주의 열강이 국제법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군사력에 따라 국제질서를 움직이던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유묵 왼쪽 아래에는 안중근 의사의 상징과도 같은 손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 위에는 ‘경술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1910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민국인 안중근이 쓰다'라는 뜻으로, 안 의사가 순국한 1910년 3월 26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쓴 글씨임을 보여준다. 글씨에는 전체적으로 획을 약간 흘려 쓰는 행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자로 쓰는 해서와 획을 생략하고 이어 쓰는 초서가 섞여 있다.
해당 유묵은 기존에 보물로 지정된 안 의사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필획의 처리방식, 자형 구성, 운필의 속도감 등 서풍 전반에서 높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고, 손도장도 일치하여 전문가들로부터 진본으로 평가받았다.
뒷면의 묵서에는 최초 소장자와 유묵의 전승 과정, 유묵을 보존하기 위해 표구해 보관한 경위 등이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뤼순감옥 형무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키치가 소장했던 유묵을 이후 ‘평문광생 뇌협일인(平門狂生 雷峽逸人)’, 즉 세속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표현한 인물이 넘겨받아 보존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8월13일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유묵 만국공법불여대포' 언론공개회에서 관계자가 유묵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지난해 5월 현지 협력망을 통해 일본에 이 유묵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처음 입수했다. 이후 국가유산청의 행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재단이 면밀한 조사와 협상을 진행했고, 같은 해 11월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이번 문화유산 환수에는 복권기금이 사용됐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따르면,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안 의사는 이를 개인적인 살인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수행한 독립전쟁이라고 주장하며 만국공법에 따른 재판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법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910년 2월14일 사형을 선고했다.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는 3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뤼순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는 안 의사가 꿈꿨던 동양의 평화와 질서가 담겼다. 그는 옥중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200여 점으로 추정되는 유묵을 남겼고, 현재까지 57점이 확인됐다. 순국을 앞두고 남긴 그의 글씨는 116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앞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