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입덧 치료제의 임산부 안정성 논란으로 약에 대한 산모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물론 의학계도 아무런 경각심 없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애초 약의 위험성을 최초 보고한 사람도 의사였다.
어떤 치료의 효능과 안정성을 입증하는 것만 의사의 업적이 아니다. 부작용을 입증하는 것 또한 의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
임신 중 타이레놀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최근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AI 이미지
따라서 여러 학문이 그렇듯 의학도 늘 갑론을박이 반복되며 발전한다. 의대생 시절 필자는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돈과 노력을 쏟아부어 쌓아 올린 현대의학보다 한낱 사이비 음모론에 빠지는 일부 사람들을 보며 안타깝고 허망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보니 원래 각종 논쟁이 얽히고설키며 발전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며, 의학 또한 그렇게 생동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에도 ‘임신 중 약물 복용’이라는 주제에서 논란거리가 있었을까? 당연히 있다. 그중 가장 뜨거웠던 감자는 바로 이미 고전적인 명약이라고 할 수 있는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 등)이다.
1878년에 처음 발견되어 1955년부터 시판된 아세트아미노펜은 사실상 오늘날 산과 의사에게 생명줄과 다름없는 약이다.
산모도 다양한 질환으로 아플 수 있는데, 태아를 생각해서 무조건 참기만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러니 산모도 필요하면 적절한 진통제 처방을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로선 산모에게 쓸 만한 약이 아세트아미노펜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밀한 분류는 다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진료실에서 사용하는 진통제는 크게 3가지 종류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아세트아미노펜, 두 번째는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 세 번째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우선 마약성 진통제는 극심한 통증이 아니면 처방할 일이 없을뿐더러, 감기약조차 태아를 걱정하는 산모가 마약성 진통제를 괜찮다고 생각할 리가 절대 없으므로 애초 고려하지 않는다.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는 이부프로펜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친숙한 약이다. 진통 효과만 있는 아세트아미노펜과 달리, 염증 완화 작용까지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태아에게 부작용이 있어 산모에겐 사용할 수 없다.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은 임신 후반기 태아의 ‘동맥관 조기 폐쇄’이다.
산모 뱃속의 태아는 탯줄에서 산소를 공급받기 때문에 산소가 풍부한 혈류가 굳이 폐를 거치지 않고 전신으로 바로 가기 위한 우회로가 존재하며 이것이 ‘동맥관’이다. 태아가 출생하면 스스로 호흡하면서 쪼그라든 폐가 펼쳐지고 동맥관은 닫히게 된다.
그런데,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는 동맥관을 미리 닫히게 만들어 태아의 산소 공급을 곤란하게 만든다. 따라서 처방에서 제외하고 나면 산모에게 남은 해열진통제는 결국 아세트아미노펜뿐이다.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산부가 안전하게 복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열진통제로 여겨져 왔다. 의사에게 처방받을 수도 있지만,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도 있고 심지어 편의점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산모의 아세트아미노펜 복용에 관해 경고성 연구들이 나왔다. 바로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복용이 자녀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및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를 유발할 수 있다”라는 논란이었다.
논란의 시작이 된 가장 유명한 연구는 2014년 미국의사협회 소아과학 학술지(JAMA Pediatrics)에 발표된 덴마크의 관찰 연구이다. 이 연구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덴마크에서 출산한 산모 중 최종 조건에 맞고 추적에 동의한 64,322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연구진은 산모에게 임신 12주, 30주, 출산 후 6개월에 전화로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후 출생한 아이가 7세가 되었을 때 부모 설문을 통해 과잉행동이 있었는지 묻거나, 아이가 과잉행동장애 진단 코드를 받았거나, ADHD 관련 약을 처방받았는지를 조회하는 방식으로 아이의 예후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한 여성이 출산한 아이는 나중에 과잉행동 증세를 보일 가능성이 13%, ADHD 관련 약을 처방받을 가능성이 29%, ADHD 진단을 받을 위험이 37% 높다고 보고하였다.
다만, 연구진도 관찰연구라는 방식의 한계점은 인정하였다. 연관성이 있다고 해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 산모가 약을 왜 먹었는지를 고려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자녀의 ADHD는 아세트아미노펜 때문이 아니라 산모가 약을 먹게 만든 근본적인 질병 상태나 유전적 요인 때문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찰연구에선 심지어 아버지가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했을 때도 어머니가 복용했을 때와 비슷하게 자녀의 ADHD 위험이 크게 나타났다.
약물이 태아의 뇌 발달에 직접적인 독성을 주어 ADHD를 유발한다는 가설이 맞다면, 태아와 직접 만나지 않는 아버지의 약 복용은 자녀의 ADHD와 아무런 연관이 없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복용도 연관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아세트아미노펜 자체의 부작용’ 때문은 아님을 시사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덴마크 연구는 아세트아미노펜을 임신 중 안전한 약물로 간주하던 기존 생각에 경고를 주기 충분했다. 당연하게도 2022년~2023년 미국에선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한 후 자녀가 ADHD나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며 제조사를 상대로 수백 건의 집단소송이 제기되어 현재까지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9월 백악관 브리핑에서 아세트아미노펜이 자폐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정치적 논란으로까지 확산했다. 이 발언 이후 미국 응급실에서 임신부 대상 아세트아미노펜 처방이 약 10% 급감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서도 뉴스를 보고 걱정하는 문의를 하는 산모가 많았다.
정치적 논란과 소송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산부인과학회(ACOG) 등은 “용법에 맞게 사용하는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신 중 안전하다”라는 기존 권고를 유지했다. 산모의 고열을 방치하는 것이 태아의 신경 발달에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결정적인 대규모 연구 결과가 발표(The Lancet 게재)되어 10여 년에 걸친 아세트아미노펜 임산부 안정성 논란은 의학계에선 사실상 종결된 분위기이다. 전 세계 40여 개 이상의 대규모 연구(수백만 명 대상)를 종합 분석한 결과,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복용과 자녀의 ADHD·자폐증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라는 결론이 났다.
특히 ‘형제자매 비교 분석’이 시사하는 바가 컸다. ‘유전적 요인’이나 ‘가정환경’ 같은 변수에 영향받지 않도록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를 비교 분석하는 방법이다.
같은 산모가 약물을 먹고 출산한 아이와 안 먹고 출산한 아이를 비교하였는데, ADHD 발생률에 차이가 없었다. 즉, 아이의 ADHD는 아세트아미노펜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유전적 요인이나 기저 질환 등 다른 원인 때문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진료실에서 산모에게 줄 수 있는 해열진통제는 어차피 아세트아미노펜밖에 없었지만, 산부인과 의사로선 혹시 모를 찜찜함이 비로소 해소되고 태아에게 안전하다고 조언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산모의 걱정을 덜어줄 그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학계는 10년도 넘는 논쟁을 벌인 것이다.
글쓴이 허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산모입원 전담 임상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미래아이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따라가며 시기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생각과 도덕적 딜레마를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