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량·체험형 소비가 확산되면서 소비자들은 더 다양한 선택지를 누리게 됐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상품과 트렌드 속에서 피로감도 함께 커지고 있다. ⓒ그래픽 허프포스트코리아
과거 소비자들은 하나의 브랜드를 선택해 오래 사용했다. 화장품은 본품을 구매했고, 과일은 한 박스 단위로 샀으며, 식당에서는 여럿이 함께 먹는 메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비의 기준은 달라졌다. 적게 사고, 다양하게 경험하고, 빠르게 갈아탄다. 이른바 '픽셀라이프(Pixel Life)' 시대다. 디지털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픽셀처럼 소비 역시 잘게 쪼개지고 있다. 거대한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취향과 상황에 맞는 경험을 짧고 다양하게 누리려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유통업계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소용량 상품의 성장이다. 뷰티업계에서는 미니 화장품과 디스커버리 세트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다. CJ올리브영은 소용량 제품만 모은 '포켓뷰티존'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이소에서는 3~5천 원 수준의 소용량 화장품이 품절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하나의 제품에 큰 비용을 투자하기보다 여러 제품을 경험하며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찾는다.
식품업계도 마찬가지다. 롯데마트와 이마트는 조각 수박과 조각 사과, 조각 배 등 소용량 과일 판매를 확대하고 있다. 배달 플랫폼에서는 1인 메뉴 경쟁이 치열해졌다. 배달의민족의 '한그릇' 서비스와 쿠팡이츠의 '하나만 담아도 무료배달' 서비스는 혼자서도 부담 없이 다양한 메뉴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겨냥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고물가 때문만은 아니다. 소비자들은 이제 소유보다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향수 본품 대신 여러 향을 체험할 수 있는 샘플 세트를 구매하고, 팝업스토어를 찾아다니며 한정판 상품을 경험한다. 비싼 제품 하나를 오래 사용하는 것보다 적은 비용으로 여러 브랜드를 경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소비로 인식되는 것이다.
유통업계 입장에서는 긍정적 변화다. 과거에는 소수의 히트 상품이 시장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수많은 틈새 상품들이 소비자를 만날 기회를 얻고 있다. 실제로 올리브영에서는 연매출 100억 원을 넘는 인디 브랜드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으며, 다이소 역시 소용량 화장품을 앞세워 새로운 뷰티 유통 채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픽셀라이프가 가져온 변화가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선택지가 늘어난 만큼 소비자의 피로감도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하나의 브랜드를 믿고 구매하면 됐지만 이제는 매 순간 수많은 선택지를 비교해야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매일 새로운 트렌드와 상품이 등장하고, 소비자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탐색한다.
브랜드 충성도 약화도 유통업계의 고민거리다. 소비자들은 특정 브랜드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은 올리브영에서 구매한 화장품을 사용하고 내일은 다이소 제품을 경험한다. 한 브랜드를 오랫동안 이용하기보다 다양한 브랜드를 순회하며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찾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소비자를 확보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일이 더 어려워진 셈이다.
과거에는 제품력만으로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제안해야 한다. 새로운 상품을 얼마나 빠르게 출시하는지, 얼마나 자주 소비자의 눈에 띄는지, 얼마나 다양한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지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팝업스토어와 체험형 매장, 한정판 상품, 샘플 증정 이벤트가 늘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끊임없는 경험 추구가 소비자의 피로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즐거움은 커졌지만 무엇이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지 판단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졌다. 선택의 자유가 확대된 만큼 선택의 책임도 소비자에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