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께서는 산업은행 이전은 지난 정권의 '불가능한 약속'이었다고 언급하셨다. 30여 년을 산업은행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금융 중심지 서울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에 동감한다."
지난해 9월15일, 박상진 한국산업은행 회장이 취임식을 마친 뒤 사내 게시판에 올린 대직원 메시지의 한 대목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국토교통부 이전 공공기관 대상 지정에서 산업은행이 해제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71년 만에 처음 나온 내부 출신 회장은 조직의 최대 현안인 본점 부산 이전을 사실상 백지화하며 임기를 시작한 셈이다.
그로부터 11개월이 지난 지금, 같은 사안이 되돌아오고 있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이번에는 박 회장을 선임한 현 정부가 산업은행을 이전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류장희 IBK기업은행 노조위원장(왼쪽부터), 정은주 한국수출입은행 노조위원장, 김현준 한국산업은행 노조위원장이 11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한국산업은행 본점 옆 의사당대로에서 열린 ‘국책은행 지방이전 저지 총력투쟁 결의대회’에서 대회사를 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비용은 벌써 발생하고 있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업은행의 지방 이전은 아직 확정된 사안이 아니지만 논의만으로도 그 ‘비용’은 이미 발생하고 있다.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3대 국책은행 노조는 11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인근 의사당대로에서 '국책은행 지방이전 저지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3사 노조가 지방 이전을 쟁점으로 함께 집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집회에는 산업은행 노조 조합원 약 900명, 기업은행 약 800명, 수출입은행 약 300명과 한국노총·금융노조 지도부, 국회의원 등을 포함해 2천 명이 넘는 인원이 결집했다.
김현준 금융노조 산업은행지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윤석열 정부 때 남들이 다 포기하라고 했을 때도 끝까지 투쟁했다"며 "금융노조 43개 지부와 한국노총, 국회에서도 우리 목소리를 함께 낼 것인 만큼 마지막까지 버티고 또다시 승리하자"고 말했다.
3개 국책은행 노조는 10일 공동 성명을 내고 "대형 국책은행을 모두 찢어 놓으면 거대한 경제적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노조가 이전 확정 이전 단계부터 실력 행사에 나선 배경에는 1차 이전 논의 당시의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평소 연 30~40명 수준이던 산업은행의 자발적 퇴사자는 부산 이전 논의가 본격화한 2022~2023년 연 100명에 가깝게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이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논의 국면 자체가 이탈을 만들어냈던 셈이다. 노조는 지방 이전이 현실화한다면 전체 인력의 20~30% 정도가 퇴사할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 회장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취임 직후 올린 사내 게시판 글에서 "지난 3년간 부산 이전 논의와 추진 과정에서 많은 직원이 큰 상처를 겪은 것으로 안다"며 "선배로서 함께 지켜주지 못해 후배들에게 미안하다"고 적었다.
◆ 상황과 명분이 달라졌다, 변수는 여당 내부의 불협화음
문제는 지난해 통했던 논리가 이번에는 그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난 정권의 불가능한 약속'이라는 명분은 이미 현 정부의 의제로 넘어온 지금은 빛이 바랬다. 이전 결정의 주체가 달라진 것이다.
부산시는 8월3일 전재수 시장 주재로 공공기관 이전 추진 전담팀 회의를 열고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과 함께 산업은행을 유치 대상에 포함했다. 부산시는 정부에 제출한 서류상으로도 산업은행이 우선순위에 있다고 밝혔다.
특기할 만한 점은 전 시장이 전임 박형준 시장과 달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 시장을 ‘이전 찬성파’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유보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8년 만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소속 부산시장으로서 산업은행의 이전에 찬성하는 부산 지역의 여론을 무시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지난번 산업은행 이전 논의 당시인 2023년 12월 국제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알앤써치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산에 거주하는 응답자의 73.8%가 이전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1차 이전 논의 당시 산업은행 이전을 밀어붙이던 국민의힘 역시 지속적으로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이후 발표될 공공기관 이전 로드맵에 산업은행 이전이 담겨있다면, 정부와 ‘야당’이 한 목소리를 내게 되는 셈이다.
변수는 여당 내부의 이견이다.
전 시장과 같은 민주당 소속인 박홍배 부산시당위원장은 동남권투자공사 설립법안 대표발의자로, 산업은행 이전의 실효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최근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산업은행 본점 이전 자체보다 지역 전략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동남권투자공사 설립"이라며 "연간 수백억 원 규모가 아니라 수십조 원 규모의 투자 기능을 가진 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11일 국책은행 3사 노조 공동집회에 참석해 “지방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국책은행 본점 이전이 아니라 지방 기업에 적기에 충분한 저리의 정책자금이 원활히 투자되는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 침묵의 데드라인 얼마 남지 않았다, 취임 1주년과 겹쳐 박상진 리더십 시험대
로드맵 확정 예정 시점은 박 회장의 취임 1주년과 겹친다. 정부가 선임한 회장이자 71년 만의 첫 내부 출신 회장으로서, 박상진 회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박 회장은 2차 이전에 대해 아직 공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이전이 확정되기 전이라는 점에서 침묵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침묵에 허용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국토교통부가 이르면 9월 중 2차 공공기관 개별 이전 예정지를 발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로드맵이 나온 뒤에는 선택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결정 이전이 침묵을 깨야 할 마지막 구간일 수도 있다.
1차 이전 논의 당시 산업은행이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소야대 국회가 있었다. 산업은행법 4조가 본점 소재지를 서울로 규정하고 있어 지방 이전을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인데, 당시 다수당이면서 야당이던 민주당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여당이 국회 다수를 점하고 있어, 로드맵에 산업은행이 포함되면 이를 되돌릴 수단 자체가 마땅치 않다.
노조 차원의 공개 요구도 준비되고 있다.
정청 금융노조 한국산업은행지부 부위원장은 허프포스트코리아와의 통화에서 "그동안은 이전 논의가 공식화된 게 없어 회장에게 입장 표명을 요구하지 않았다"면서도 "지금은 공론화 과정 없이 바로 발표가 될 것 같고, 산업은행을 포함한 국책은행이 원론적으로 이전 대상에 포함돼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기관의 경쟁력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아무리 공공기관의 장이 정부가 임명하는 자리라 해도 입장 표명은 필요하다"며 "조만간 이를 요구하는 노동조합 차원의 요구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