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접어든 뒤 넷플릭스 몰아보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있다. "아직도 시청 중이신가요?"라는 안내창이 뜰 만큼 한자리에서 TV를 오래 보는 습관이 훗날 뇌 건강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중년기에 TV를 자주 본 사람은 20여 년 뒤 기억 관련 뇌 영역과 전두엽·후두엽의 용적이 더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연구진은 TV 시청이 뇌 변화를 직접 일으켰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AI 생성 이미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연구진이 발표한 최신 연구에 따르면, 중년기에 TV를 자주 보는 습관은 노년기의 뇌 구조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술지 '알츠하이머병과 치매'에 발표된 연구 결과를 보면, 중년에 TV를 "매우 자주" 봤다고 답한 사람은 훗날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의 크기가 더 작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전두엽과 후두엽은 용적도 더 작았고 뇌 백질 손상은 더 심했다. 이러한 변화는 노화뿐 아니라 뇌졸중 위험 증가와 인지기능 저하, 치매 등과 관련이 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생물과학과 연구원이자 이번 연구의 공동 저자인 나탄 페터는 좌식 생활과 뇌 건강의 연관성을 다룬 기존 연구들이 주로 사람이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3년 하버드대학교 연구에서는 하루 10시간 이상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생활이 훗날 치매 발병 위험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페터 연구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단순히 앉아 있는 시간뿐 아니라 앉아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뇌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지는지 살펴본 것이다.
페터는 허프포스트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는지만큼이나 앉아서 무엇을 하는지가 20년 뒤 뇌 용적을 예측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며 "TV를 오래 볼수록 알츠하이머병에 특히 취약한 뇌 영역의 용적이 작았고, 뇌 소혈관 손상의 징후도 더 많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미국에서 장기간 진행된 '지역사회 동맥경화 위험(ARIC) 연구'에 참여한 성인 약 1700명의 자료를 분석했다. 참가자들은 1987년부터 1989년 사이 연구에 등록했으며 당시 평균 나이는 약 53세였다. 이들은 여가 시간에 TV를 얼마나 자주 보는지, 근무시간에는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는지 직접 보고했다.
20여 년 뒤 연구진은 참가자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했다. 그 결과 TV를 "전혀" 또는 "거의" 보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들보다 "매우 자주" 본다고 답한 사람들에게서 뇌 구조 전반에 걸친 차이가 확인됐다.
TV를 가장 자주 본 집단은 전두엽과 후두엽의 크기도 더 작았다. 전두엽은 계획과 의사결정 등 각종 실행기능에 관여하고, 후두엽은 시각 정보를 처리한다. 연구진이 신체활동과 당뇨병, 체질량지수(BMI), 흡연, 음주 등 뇌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들을 반영한 뒤에도 이러한 차이는 유지됐다.
페터는 "다른 일반적 좌식 활동에서는 오히려 반대 양상이 나타났다"며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느냐보다 앉아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똑같이 앉아서 하는 뜨개질이나 단어 퍼즐 게임인 '워들'과 달리 TV 시청은 왜 뇌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을까?
이번 연구만으로 정확한 이유를 밝혀낼 수는 없지만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다. 우선 TV 시청은 다른 활동과 비교해 머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일이 적은 수동적 활동이라는 점이다.
연구진은 앉아 있는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뇌 건강과 관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 생성 이미지.
페터는 "TV는 한번 보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쉬지 않고 앉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간식을 먹거나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등 건강하지 않은 행동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독서나 컴퓨터 사용, 취미 활동은 정신적으로 더 많은 자극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연구는 참가자들을 장기간 관찰해 연관성을 확인한 관찰연구다. 따라서 TV 시청이 이러한 뇌 변화를 직접 일으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좌식 시간 역시 참가자들이 과거의 생활습관을 기억해 직접 답하는 방식으로 측정됐기 때문에 오차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누구도 '러브 이즈 블라인드(넷플릭스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를 보느라 인생의 몇 시간을 날렸는지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페터는 "앞으로 웨어러블 기기(신체 착용형 기기)와 뇌 영상 촬영 등을 활용하면 생활습관과 뇌 건강의 관계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TV 시청 시간을 줄이고 그 대신 머리를 더 많이 쓰는 활동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뇌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