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기탁금 인하를 공개적으로 제안한 지 이틀 만에 민주당이 당대표와 최고위원 후보의 기탁금을 각각 2천만 원씩 내렸다.
민주당은 이 대통령의 발언 전부터 재검토에 들어갔다고 설명하지만, 대통령이 구체적 방향을 제시한 직후 당이 같은 방향으로 규칙을 바꾼 장면은 대통령의 당무 개입 논란을 불러왔다. 일각에서는 유시민 작가가 경고한 '이 대통령의 당무개입'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에 도전하는 정민철 정책위원회 부의장이 14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 중앙당 선거관리위원회는 21일 오전 국회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당대표 후보 기탁금을 1억 원에서 8천만 원으로, 최고위원 후보 기탁금을 5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낮췄다.
기탁금은 후보 난립을 막고 선거 관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출마자가 당에 내는 일종의 '출마 보증금'이다. 만 39세 이하 원외 청년 후보에게 적용되는 50% 감면을 고려하면 청년 최고위원 후보의 부담액은 2500만 원에서 1500만 원으로 줄었다.
임호선 당 선관위 부위원장은 "한병도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18일 소병훈 선관위원장에게 기탁금 재검토를 요청했고, 당 선관위도 같은 날 재심의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관련 글을 올린 19일보다 하루 앞선 만큼 대통령의 한마디로 없던 논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당무개입 논란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미 진행되던 당내 논의에 현직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가세해 '구체적 해답'을 제시하고, 당 지도부와 선관위가 곧장 이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앞서 기탁금 논란은 2001년생 정민철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이 개인 계좌로 후원금을 모으면서 불거졌다.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한 정 부의장은 정치자금법 위반 소지가 제기되자 18일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모금액을 모두 반환하겠다고 밝혔다. 방송 도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금수저가 아니면 청년 정치인은 출마하기도 어렵다는 취지로 호소했다.
이 대통령은 다음 날인 19일 엑스(X, 옛 트위터)에 원외·청년 후보의 부담을 거론하며 "가능하다면 기탁금을 종전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을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한다"고 제안했다. 정 부의장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유튜브 생방송에서 기탁금 부담을 호소한 이튿날 동일한 문제를 꺼내 들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정 부의장에게 힘을 실은 메시지로 민주당 안팎에서는 받아들였다.
한 누리꾼이 "지금 당신이 대통령인지 민주당 대표인지 착각하는 것 같다"며 당무개입을 지적하자, 이 대통령은 같은 날 해당 댓글을 공유하며 직접 반박하기도 했다. 대통령도 당원으로서 일상적인 정당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며 청년 기탁금 인상에 의견을 내는 것은 당무개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청와대도 20일 출입기자단 공지를 통해 "선거공영제의 취지와 청년 정치 참여에 대한 원칙적 의견"이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민의례 후 착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로 이 지점에서 유시민 작가의 비판이 다시 정치권의 주목을 끌고 있다. 유 작가의 문제제기는 대통령에게 당무에 관한 의견을 낼 법적 권리가 있느냐 여부가 아니었다. 대통령의 말이 당의 독자적이고 자율적 판단을 좌우하는 '제왕적 지배 구조'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유 작가는 15일 유튜브 방송 '최욱의 매불쇼'에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경선, 국회의장과 당대표 선출을 둘러싼 이른바 '명픽' 논란을 거론하며 이 대통령이 주요 의사결정권자 자리에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앉히려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지적이었다.
특히 유 작가는 방송 말미에는 "민주당이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당은 해체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 작가의 주장은 대통령과 집권당이 서로 거리를 두라는 뜻이 아니다는 것을 보인다. 민주당이 독자적 판단과 견제 기능을 잃고 청와대의 의중을 따르는 '거수기'로 퇴행한다면 대통령의 실패가 곧 당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그럼에도 당내 반응은 유 작가의 문제 제기가 타당한지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가 이재명 정부의 실패를 바란다는 쪽의 반격으로 흘렀다. 청와대 출신의 김남준 민주당 의원은 16일 페이스북에서 "대통령 말을 왜곡해 대통령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김민석 당대표 후보도 같은 날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유 작가의 발언에 관한 질문을 받고 "통상적인 평론의 영역은 벗어나신 것으로 보인다"고 에둘러 비판했다.
앞서 장철민 민주당 의원은 15일 페이스북에 "이재명 정부의 필연적인 실패를 바라는 것 아닌가"라고 썼고, 이건태 의원도 같은 날 페이스북에서 "정권교체를 누구보다 외쳤던 사람이 이제는 정부 실패를 예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요컨대 민주당 다수 의원들은 유 작가의 문제 제기에 정면으로 답하기보다 '충성심 공방'에 여념 없는 모습니다. 이런 모습 역시 오히려 유 작가의 '당의 예속' 비판이 맞아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