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누군가에게 그런 부탁을 해본 적은 없는가. 살다 보면 한 번쯤 겪게 되는 일이다.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는 순간 얼마나 난처해지는지도 알 것이다. 거절하자니 오랜 관계가 상할 것 같고, 들어주자니 마음 한구석이 끝내 불안하다.
돈으로 무너진 관계는 배신의 상처로 남아 오래 지속된다. AI 이미지.
정이숙(가명)씨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자료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지쳐 보였다. 두 번째 파산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또?'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쉽게 단정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는 알코올성 간경화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기초생활수급자로 근근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한 번 파산을 겪어본 터라 누구보다 카드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그런 그가 어쩌다 다시 파산하게 되었을까.
이야기의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동네 친구가 있었다. 반찬가게도 하고 옷가게도 하던, 자기보다 형편이 나아 보이던 친구였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찾아와 말했다.
"내가 지금 개인회생 중이라 카드 발급이 안 돼. 장사하는 데 꼭 필요하니까 네 이름으로 하나만 만들어줘. 쓴 건 그때그때 갚을게."
처음에는 거절했다. 카드가 어떻게 사람을 무너뜨리는지 이미 몸으로 겪었으니까. 하지만 친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랜 사이에 왜 나를 못 믿느냐는 말 앞에서 힘들 때마다 의지가 된 세월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카드를 만들어 건넸다.
처음 얼마간은 약속한 날짜에 꼬박꼬박 입금했기에 믿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금액이 슬그머니 커지기 시작했다. 몇십만 원이던 것이 어느새 수백만 원이 되었다. 급기야 친구는 사업 자금이 더 필요하다며 대부업체 대출까지 부탁했다. 불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매달 이자가 또박또박 들어오니, 의심할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연락이 끊겼다. 며칠을 기다리다 가게를 찾아갔더니 문은 닫혀 있었고, 카드사와 대부업체에서 연체 통보가 날아들었다. 몇 달 뒤에야 겨우 통화가 된 친구는 사업이 다 망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그의 앞으로 7000만 원의 빚이 남았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그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며 자책했다. 정작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빚이 아니었다. 오랜 친구를 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친구가 정말 나쁜 마음을 먹고 저를 속인 건지 확신이 안 서요. 그런 건 아니겠죠, 변호사님…?”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사실 신뢰를 이용한 이런 수법은 너무 많이 봐왔기에 이야기만 들어도 짐작이 간다. 처음부터 갚을 생각이 없었다면 법적으로는 분명한 사기다. 설령 갚을 마음이 있었더라도,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솔직히 말하는 대신 사라져버린 것은 배신이다. 하지만 정이숙씨 같은 이들에게는 그런 법적 판단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훨씬 무겁다. 그가 듣고 싶었던 답도 '그건 사기예요'라는 한마디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사람을 악인으로 단정하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돈이 관계를 시험하는 것은 친구 사이만의 일이 아니다. 여든을 바라보던 한 어르신은 위암 수술과 실직으로 외롭던 시절, 곁을 지켜준 이에게 가전제품을 사주고 용돈을 건네다 빚을 졌다. 지금도 그분을 만나시느냐 묻자 그는 짧게 답했다. "이제 돈이 없다고 하니까 연락이 끊겼어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어찌 잘못이겠는가. 다만 그 마음의 끝에 돈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돈은 관계를 시험한다. 그리고 시험 앞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무력하다. 거절하지 못한 마음을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사람을 믿고 싶었던 그 마음마저 어리석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누군가를 믿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속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 번 무너진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자리는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글쓴이 왕미양은 변호사로 현재 한국여성리더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6년 1월에 제13대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직을 마쳤다. 여성 변호사가 100명 남짓이던 2000년에 법조계에 첫발을 들인 이래, 성남여성의전화 무료 상담을 시작으로 아동·여성·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 활동에 매진해왔다. 2010년부터는 13년 동안 파산관재인으로 2,400여 명의 채무자를 만나며 "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2026년, 여성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폭력 피해자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 지원 공로로 '올해의 서울여성상'을 수상했다. 칼럼을 통해 법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