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사임으로 앤디 버넘 하원의원이 차기 총리이자 집권 노동당 대표가 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이에 버넘 의원이 혼란에 빠진 영국 정치를 수습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성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앤디 버넘 영국 노동당 총리 후보. ⓒ로이터=연합뉴스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꼽히는 버넘 의원은 22일(현지시각) "키어(전 스타머 총리)의 결정은 새로운 이행 과정의 시작이며, 이 과정은 질서 있고 책임감 있게 이뤄져야 한다"며 사실상 총리 도전 의사를 밝혔다고 영국 언론들이 일제히 전했다.
그는 이어 "국가는 안정성과 신중한 리더십, 그리고 핵심 현안에 대한 지속적인 집중을 기대하고 있다"며 "국민은 경제 성장과 생활비 부담 완화, 공공서비스 개선, 주거 문제 해결, 다음 세대를 위한 기회 확대에서 실질적인 진전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8일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버넘 의원은 이날 런던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정식 취임 선서를 하고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앞서 키어 스타머 현 총리는 같은 날 총리 사퇴 의사를 밝히며 오는 7월9∼16일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NEC)를 통해 대표 후보 지명 절차를 진행하고, 9월1일 의회 개회 이전에 차기 대표를 확정하는 일정을 제시했다.
당내 지지 기반이 탄탄한 버넘 의원은 경쟁 후보 없이 충분한 수의 의원 지지를 확보할 경우 경선 없이 대표로 선출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2007년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힌 뒤 고든 브라운이 경선 없이 노동당 대표로 추대돼 총리직에 오른 전례가 있다.
버넘 의원은 리버풀 교외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노동당에 입당했다. 케임브리지대 졸업 후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2001년 31세의 나이로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17년간 하원의원을 지내며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문화부·보건부 장관, 재무부 수석부장관, 내무부·보건부 차관 등을 역임했다. 노동당이 야당이 된 이후에는 예비내각(shadow cabinet) 보건·교육·내무장관을 맡으며 당내 입지를 다졌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는 63.4%의 득표율로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에 당선됐다. 그는 지역 경제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중앙정부와 공개적으로 대립하며 지역 방역 권한과 지원 확대를 요구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또한 민영화된 버스 체계를 개편해 지방정부가 운임과 노선을 직접 관리하는 공영 모델을 도입하는 등 대중교통 시스템 혁신의 가시적인 성과를 남겼다. 우리나라 이명박 서울시장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버넘 의원은 중앙정부보다 지역정부가 핵심 공공서비스를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펼쳐왔으며, 이를 '맨체스터리즘(Manchesterism)'으로 명명했다. 이는 영국의 고질적인 런던 중심의 정치 구조에 대한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버넘 의원 앞에는 적지 않은 과제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지난 10여 년간 반복된 총리 교체로 흔들린 영국 정치의 안정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
영국은 데이비드 캐머런(2010~2016), 테리사 메이(2016~2019), 보리스 존슨(2019~2022), 리즈 트러스(2022), 리시 수낙(2022~2024), 키어 스타머(2024~2026)에 이어 또 다른 총리를 맞게 됐다. 잦은 총리 교체의 배경에는 장기간 누적된 경제 침체와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존 재정위기, 브렉시트,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을 연이어 겪으며 경제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실질임금은 10년 넘게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브렉시트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8%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팬데믹 시기의 대규모 재정지출까지 겹치며 국가 부채도 크게 늘었다.
제도적 특성 역시 총리 교체를 쉽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영국은 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총리가 국민 직선으로 임기를 보장받지 않는다. 집권당이 지도부 교체를 결정하면 총선을 치르지 않고도 총리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당내 신뢰가 무너질 경우 지도자가 빠르게 교체될 수 있다.
버넘 의원이 넘어야 할 첫 관문은 노동당 내 지지 기반을 확실히 구축하는 것이다. 그는 노동당 하원의원 20%인 81명 이상의 지지를 확보해야 지도부 경선에 나설 수 있다. 스타머계 인사들과 현 지도부가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버넘 의원이 당내 다양한 세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결집할 수 있을지가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생활비 부담 완화, 공공서비스 개선, 주택 공급 확대, 에너지 정책 개혁 등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민생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스타머 총리가 집권 2년 만에 사임한 배경 역시 이러한 과제의 무게를 보여준다. 엡스타인 관련 인사 검증도 논란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고물가와 경기 침체에 대한 불만, 잇따른 정책 번복으로 인한 리더십 훼손 등이 누적되며 지지율이 급락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평가된다.
결국 버넘 의원은 전임 총리를 무너뜨린 민생과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만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