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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보이 슬립스' 장면 중. ⓒ판씨네마
'라이스보이 슬립스' 장면 중. ⓒ판씨네마

“라이스보이! 라이스보이!” 웃음소리로 가득한 놀이터에서 홀로 인상을 찌푸리고 서있는 어린 동현(황도현)을 향해 쏟아진 말이다. 화를 참지 못한 동현은 “두 유 노 태권도”를 외치며 또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스포일러 포함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캐나다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소영(최승윤)과 하나뿐인 아들, 동현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국에서 남편을 떠나보낸 소영은 낯선 캐나다 땅에서 홀로 아들을 키운다. ‘학교 가기 싫다’는 동현의 떼쓰기는 소영에게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 억지로 끌려간 학교에서 동현은 김밥에서 ‘방귀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만다. 김밥과 미역국을 화장실 쓰레기통에 몽땅 버린 동현은 소영에게 앞으로 김밥 대신 ‘친구들이 먹는 것’을 챙겨달라고 말한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눈 양 끝을 늘리는 동현.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얼굴에 의구심이 가득하다. ⓒ판씨네마
거울을 보며 자신의 눈 양 끝을 늘리는 동현.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얼굴에 의구심이 가득하다. ⓒ판씨네마
소년이 된 동현. ⓒ판씨네마
소년이 된 동현. ⓒ판씨네마

그로부터 9년 뒤, ‘데이비드’라는 영어 이름이 더 익숙해진 16살 동현(이든 황)은 거울을 보며 능숙하게 파란색 렌즈를 착용한다. 노란 머리와 은색 목걸이 역시 동현이 친구들과 닮아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다. 동현은 친구의 집에서 ‘마약 브라우니’를 먹으며 야동을 감상한다. 동현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소영은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소영은 한국어로, 동현은 영어로 서로의 주장을 펼치며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진다. 그 순간 둘의 대화에 묵직한 돌덩이 같은 것이 ‘툭’ 떨어진다. “나 암에 걸렸어”라는 소영의 고백이다.

소영 역을 맡은 배우 최승윤. ⓒ판씨네마
소영 역을 맡은 배우 최승윤. ⓒ판씨네마
어린 동현 대신 화를 내주는 소영. ⓒ판씨네마
어린 동현 대신 화를 내주는 소영. ⓒ판씨네마

소영은 연고도 없는 캐나다에서 공장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온갖 수모를 겪는 소영이지만, 그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정수기 앞에서 자신에게 무례한 터치를 일삼는 동료에게 ‘다시는 이러지 말라’며 으름장을 두는가 하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동현이 오히려 정학을 맞게 되자 ‘이건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암 선고를 받는 병원에서도 소영은 두꺼운 영어사전을 펼치고 의사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다.

 

당당함이 곧 무기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보고 자란 앤소니 심 감독은 “아시아 여성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를 보면 조용하거나 약한 모습이 주를 이뤘다. 강하면서도 약한 모습이 있는 ‘사람’다운 캐릭터를 ‘소영’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을 찾은 소영과 동현. ⓒ판씨네마
한국을 찾은 소영과 동현. ⓒ판씨네마

소영 역을 맡은 최승윤은 다큐멘터리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를 연출한 감독이다. 우연한 기회로 ‘라이스보이 슬립스’ 오디션을 봤던 최승윤은 “지원 당시까지만 해도 캐나다의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인 줄 알았다. 이렇게 전 세계에 상영되고 한국 관객들까지 만나게 되어 신기할 따름”이라고 개봉 소감을 전했다. 반면 앤소니 심 감독은 최승윤을 보자마자 ‘이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그는 “배우를 캐스팅할 때 연기 실력보다는 내가 상상했던 캐릭터와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봤다”라며 “최승윤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다. 약한 모습과 당당한 모습이 모두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최승윤 배우의 눈부신 연기. ⓒ부산국제영화제
최승윤 배우의 눈부신 연기. ⓒ부산국제영화제

앤소니 심 감독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최승윤은 첫 장편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소영’ 역을 소화했다. 특히 산 정상에서 그간의 ‘한’이 한 번에 터진 듯 목놓아 비명을 지르는 장면에서 전율이 돋을 정도였다. 소영의 비명은 관객에게 딱 한 번만 들린다. 이후 극적인 배경음과 함께 보이는 소영의 표정이 압권이다. 최승윤은 “그간의 모든 서러움이 터진 장면”이라며 “나도 모르게 ‘소영’의 감정에 완전히 이입해버렸다. 모든 배우가 촬영 말미에는 맡은 인물 그 자체였다”라고 설명했다. 앤소니 심 감독은 “영화 ‘대부3’에서 알 파치노가 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우는 소리 대신 음악을 삽입한 것이 인상 깊었다”며 “사람이 우는 소리를 보여주는 것보다 우는 모습(표정 등)을 보여주는 게 더 잘 와닿을 수 있구나 깨달았다. 시나리오 때부터 염두해둔 장면”이라고 덧붙였다.

 

‘리얼해도 너무 리얼해’ K-문화 제대로 보여줘

한국계 캐나다인인 앤소니 심 감독은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통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여정을 담았다. 그는 “나 역시 (극 중 어린 동현처럼) 많이 놀림도 당하고, 왕따도 당했다. 그때 엄마가 ‘두 유 노 태권도’라고 외치라고 시켰다”라며 “외국스러운 이름을 자녀에게 지어주는 장면도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마을 버스를 탄 소영과 동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의 마을 버스를 탄 소영과 동현. ⓒ부산국제영화제

극 중 웃음을 자아내던 ‘목욕탕’ 장면 역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 후반부, 소영은 동현을 데리고 한국의 시댁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동현은 난생처음 본 작은 아버지, 인식(강인성)과 함께 목욕탕에 방문해 서로 때를 밀어주고, 탕에 들어가 물장구를 친다. 앤소니 심 감독은 “어렸을 때 경험 중 추억에 남았던 장소가 바로 목욕탕”이라며 “두 사람이 목욕탕 물 안에서 순수하게 노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인식은 동현에게 목욕탕 문화뿐만 아니라, 빈 잔에 소주를 따르는 법과 함께 ‘고개를 돌려 소주를 마셔라’라며 술 문화도 알려준다. 이발소에서 노란 머리카락을 모두 민 동현은 거울을 보며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라이스보이 슬립스' ⓒ판씨네마
16mm 필름으로 촬영된 '라이스보이 슬립스' ⓒ판씨네마
16:9의 화면비로 촬영된 한국 장면. ⓒ판씨네마
16:9의 화면비로 촬영된 한국 장면. ⓒ판씨네마

앤소니 심 감독은 16mm 필름으로 영화를 촬영했다. 이는 어릴 적 촬영된 ‘홈비디오를’ 떠올리게 만든다. 캐나다 장면에서 줄곧 4:3을 유지하던 화면비가 한국 장면에서 16:9로 넓어지며 광활한 자연 풍경이 펼쳐지는 것도 인상 깊다. 앤소니 심 감독은 “넓은 캐나다 땅에서 살지만, 처한 상황이 너무 힘들어 주위 풍경을 제대로 둘러볼 수 없는 현실을 담고 싶었다”라며 “반면 한국의 크기는 캐나다보다 작지만, 극중 인물들이 한국에 도착하자 비로소 마음이 탁 트이는 듯한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영화 속 숨은 감독 찾기!?

'사이먼' 역을 직접 연기한 앤소니 심 감독. ⓒ판씨네마
'사이먼' 역을 직접 연기한 앤소니 심 감독. ⓒ판씨네마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앤소니 심 감독의 모습.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앤소니 심 감독의 모습. ⓒ부산국제영화제

극 중 소영이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기댈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사이먼’이다. 그런데 이 ‘사이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로 앤소니 심 감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앤소니 심은 배우였다. 한 번도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다는 그는 연극 현장에서 부딪히며 몸소 연기 경험을 쌓았다. 그 후 촬영과 편집까지 배운 앤소니 심은 직접 영화를 연출하고, 배우로 출연했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언어를 초월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토론토영화제에서 “2022 최고의 캐나다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플랫폼 심사위원상’을 품에 안았다. 그뿐만 아니라 작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플래시 포워드 관객상’을 수상하며 “제2의 ‘미나리’”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언뜻 보면 '차별'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따뜻한 인간미가 담긴 영화”

강인성 배우가 전한 말처럼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인간미가 가득하다. 먼 캐나다 땅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다. 사람 냄새 가득한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오는 4월 19일 개봉한다.

'라이스보이 슬립스' 포스터. ⓒ판씨네마
'라이스보이 슬립스' 포스터. ⓒ판씨네마

 

남유진 에디터 yujin.nam@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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