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이별은 무엇인가? 지난해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데이터솜을 통해 미혼남녀 300명에게 가장 불쾌한 이별 방법이 뭐냐고 묻자 무려 63% 응답자가 잠수이별이라고 답했다. 압도적 1위다. 잠수이별이 뭐냐고? 그걸 모르는 당신에게 약간의 부러움과 경탄을 느끼며 설명하자면, 잠수이별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연락과 만남을 끊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가연 관계자는 잠수이별에 대해 "무작정 연락을 끊는 것은 가장 예의 없는 이별 중 하나"라며 "헤어져야겠다면 마음을 솔직히 밝히고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상대와 나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 마디로 잠수이별은 "죄는 아니지만 좋지 못한 행동"쯤 되겠다. '이니셰린의 밴시'(이하 '이니셰린')에서 가톨릭 사제가 콜름(브렌단 글리슨 분)에게 지적했듯 말이다.
잠수이별 영화로 시상식 휩쓴 마틴 맥도나는 누구?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당신은 놀랄 수도 있다.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과 골든 글로브 시상식, 베니스 국제영화제 등을 돌며 무려 124개 부문을 휩쓴 화제작 '이니셰린'이 흔하디흔하고 가볍디가벼운 잠수이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에. 설마 하는 의혹을 품을 수 있다. 근데 맞다.
영화감독 마틴 맥도나는 "파우릭(콜린 파렐 분)은 콜름이 왜 더 이상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우리가 연인에게 일방적으로 버려졌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나를 좋아하기는 한 거야, 아니면 나 혼자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착각한 거야?'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관객들이 둘 중 어느 쪽과 자신을 동일시하는지 보는 것이 흥미롭다. 먼저 절교를 선언한 '콜름'의 단호함이 이해될까,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받은 다정한 '파우릭'에게 더 공감될까?"라며 관전 포인트를 전한 바 있다.
근데 마틴 맥도나가 누구냐고? 간략히 설명하자면 영화 '킬러들의 도시' '세븐 싸이코패스' '쓰리 빌보드'를 연출, 다크 코미디즘의 거장으로 불리는 아일랜드 출신의 천재(!) 극작가 겸 영화감독이자 '이니셰린의 밴시들'로 이제는 예술가로서 새로운 지평을 맞이한 타칭 '21세기 셰익스피어'쯤 되겠다. 잘생긴 외모는 고작해야 덤이다. 부럽게.
'이니셰린의 밴시' 제목의 뜻과 아름다운 아일랜드, 그리고 내전
그런 마틴 맥도나의 네 번째 장편 연출작인 '이니셰린'은 아일랜드로 시작해서 아일랜드로 끝나는. 어쩌면 아일랜드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작품이다. 일단 감독부터 아일랜드 출신에 콜린 파렐, 브렌단 글리슨, 케리 콘돈, 배리 케오간까지 주연진들이 전부 아일랜드 출신 배우들이다. 거기에 작중 또 하나의 인물이라 해도 과장이 아닌 아일랜드 서부 이니시어섬의 스산하고도 신비로운 성서적 풍광은 또 어떻고. 맥도나는 "이니셰린은 가상의 섬이므로 구체적인 장소가 되기보다는 신화에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기를 원했다"며 미장센의 주된 테마를 설명했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쯤에서 예측 하나 해보겠다. 당신은 아마 처음부터 궁금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니셰린의 밴시'가 무슨 뜻인지. 이니셰린이 섬인 건 막 알았을 테니 이제 밴시만 남았다. 중세 RPG 게임을 좀 했거나 영미권 공포소설을 좋아한다면 낯익을 이름 밴시는 아일랜드 민담 속 요정 혹은 귀신으로 가까운 이웃의 죽음을 예고하는 무해한 존재다. 그러니까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니셰린 섬에 사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영화가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대체 왜 이 아름다운 섬에 죽음이 들어선다는 걸까? 일단 시대 탓이 있다. '이니셰린'의 배경이 되는 때는 1923년 4월. 아일랜드 내전이 정점으로 치닫던 무렵이다. 영국령 아일랜드로 남을 것이냐, 완전한 독립을 이룰 것이냐. 이를 두고 아일랜드 자유국과 IRA가 주고받는 대포 소리는 본토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니셰린까지 울려 퍼진다. 이에 파우릭은 중얼거린다. "다들 행운을 빈다. 뭘 위해 싸우는진 모르겠지만."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일랜드를 휘감은 전운은 작은 섬 이니셰린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콜름은 날마다 함께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던 친구 파우릭에게 돌연 절교를 선언하고 파우릭은 이를 거절한다. 이때부터 두 남자는 참전자가 단둘뿐인 작은 전쟁에 돌입한다. 맥도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니셰린'은 저쪽에서 더 큰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두 남자 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고. 그가 말한 더 큰 전쟁은, 2006년 켄 로치 감독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보여준 그 전쟁을 의미하는 게 맞다.
주름살 개수부터 다른 두 남자의 기약없는 다툼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두 남자의 작은 전쟁은 좁힐 수 없는 거리에서 비롯됐다. 두 남자를 잘 보라. 세월의 간극이, 나이와 연륜의 차이가 느껴지나? 콜름을 맡은 브렌단 글리슨과 파우릭을 맡은 콜린 파렐 두 배우의 실제 나이 차이는 21살이다. 두 사람은 말할 때 이마에 잡히는 주름살 개수부터 확 다르다(글리슨은 10개, 파렐은 3개다). 콜름은 "지적인 양반"이며 모차르트를 동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파렐은 "지루하다." 2시간 동안 조랑말 똥에서 뭐가 나온 얘기를 한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다. 조랑말과 모차르트. 그들에게는 포유류라는 공통점밖에 없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콜름과 파우릭은 쓰는 색도 정반대다. 선량하고 친절하지만 지적으로 밋밋한 파우릭. 그의 집과 옷은 대개 갈색과 녹색이다. 눈에 편안함을 주는 일명 자연의 색이다. 어디에 둬도 잘 어우러지지만 인상에 깊이 남지는 않는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반면 콜름의 집에는 노란색, 붉은색 장식이 눈에 띄게 배치돼 있다. 이니셰린의 푸른 자연에서 노랑과 빨강은 자기주장이 강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색이다. 콜름의 예술가적 자아와 개성을 드러낸다. 콜름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으로 지목한 시오반(케리 콘돈) 역시 노란 옷과 붉은 옷을 즐겨 입는다. 시오반은 파우릭의 여동생이며 이니셰린의 삶에 신물을 느끼고 본토로 떠나는 인물이다. 끝으로 불현듯 나타나 죽음을 예고하는 노파의 담뱃대 끄트머리 역시 노란색으로 칠해져 발랄한 색상에 우울함, 불길함을 매치시키는 맥도나 특유의 아이러니한 연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로 다른 두 남자 사이에서 움튼 갈등은 서로를 향한 극단적 행위로 번지고, 이는 이니셰린 전체에 불안과 폭력 그리고 불행의 바이러스가 되어 퍼져나간다. 결국 밴시의 예고대로 어떤 생명은 목숨을 잃게 되며 살아남은 이들은 또다시 맑게 갠 하늘 아래 서서 먼바다를 내다보며 내일을 기약한다. 언젠가부터 본토에서 들리던 대포 소리가 멈췄다. 1923년 4월 10일, 공화국 총사령관 리암 린치가 사살당하며 내전은 사실상 종막으로 향했지만 글쎄. 파우릭은 이렇게 말했다. "끝이라고? 이제부터 시작이야." 3월 15일 극장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