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정권이 팔레스타인계 시민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는 아랍계 정당들과 손에 달리게 됐다.
5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2021년 아랍계 정당 통합아랍명단(라암)은 연정에 합류하면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12년 연속 집권을 끝내는 데 힘을 보탰다.
이번 총선에서도 아랍계 정당들이 정권 교체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네타냐후의 집권 연합과 가디 아이젠코트 중심의 야권 모두 의회 과반에 못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야권이 아랍계 정당들의 지지를 얻으면 정부를 꾸릴 길이 열리지만, 협력에 대한 내부 반대가 걸림돌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 총선 다음 날인 10월28일(현지시각) 예루살렘에서 한 아랍계 여성이 아이와 함께 찢어진 리쿠드당 선거 광고 옆을 지나가고 있다. 광고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습과 함께 “우리에게는 승리할 기회가 한 번 있다”라는 히브리어 문구가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로이터의 28일(현지시각) 보도에 따르면 약 86% 개표 시점에서 이스라엘 주요 방송사들은 네타냐후 진영이 전체 120석 가운데 53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했다. 전직 군 참모총장 아이젠코트를 중심으로 한 야권은 48석, 아랍계 정당들은 역대 최대인 19석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됐다.
가디 아이젠코트 야샤르당 대표가 10월28일(현지시각) 오전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의 선거 개표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왼쪽).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같은 날 예루살렘의 선거 개표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스라엘은 유권자가 정당에 투표해 의회인 크네세트의 의원을 뽑는 의원내각제 국가다. 대통령은 선거 후 각 정당의 의견을 듣고 정부를 구성할 의원을 지명한다. 지명자는 다른 정당들과 협상해 정부를 구성하고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전체 의석의 과반은 61석이다. 현재 전망대로라면 야권과 아랍계 정당들의 의석을 합쳐 67석이 된다. 연립정부를 함께 꾸리거나 내각 구성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의회에서 지지를 선언한다면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
실제 2021년 네타냐후 교체라는 목표가 이념과 민족의 경계를 넘는 양쪽의 협력으로 이어졌다. 만수르 아바스가 이끄는 라암은 나프탈리 베네트·야이르 라피드 주도의 연정에 참여했다. 독립적인 아랍계 정당이 이스라엘 집권 연합에 정식 참여한 첫 사례였다.
좌파부터 우파, 아랍계 정당까지 모인 새 정부는 같은해 6월 출범했다. 네타냐후를 물러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책적 차이가 큰 정당들이 모인 만큼 출범 당시부터 연정의 불안정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이번에도 연정을 위한 협상은 이뤄지겠지만 합의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아이젠코트는 개표 초기 시오니즘 세력을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랍계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하는 방안에 거리를 둔 것으로 해석됐다.
아랍계 정당들의 입장도 같지는 않다. 로이터에 따르면 아랍계 정당의 유세프 자바린 대표는 네타냐후 정부를 교체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이젠코트 측이 가자지구 군사작전과 레바논 남부 점령 등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그의 정부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정권 교체를 돕는 것과 연정에 들어가는 것을 구분한 것이다.
야권 안에서는 협력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가디언에 따르면 중도좌파 민주당의 야이르 골란 대표는 아랍계 정당들과 협상에 들어갈 것을 촉구했다. 아랍 시민들의 표를 배제하면 결국 네타냐후에게 유리해진다는 주장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는 팔레스타인계 유권자의 투표 참여가 특히 두드러졌다. 상당수는 네타냐후 내각의 정책과 태도를 노골적인 인종차별로 받아들이고 투표에 나섰다. 전체 투표율은 77.7%로, 1999년 이후 가장 높았다. 팔레스타인계 유권자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계 시민들이다. 가자지구나 요르단강 서안지구 주민들과 국적이 다르다.
집권 연합의 과반 상실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커다란 정치적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는 2023년 10월7일 하마스의 공격을 막지 못한 책임론과 극우 세력과의 연대,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들의 병역 면제를 둘러싼 반발 속에서 치러졌다.
다만 이를 네타냐후 총리의 완패로 보기는 어렵다. 로이터는 그가 유대계 유권자 사이에서 예상보다 강한 지지를 확보했다고 분석했다. 네타냐후 진영의 의석 수도 아이젠코트 진영을 앞설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야권의 집권 기반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은 셈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30년 가운데 약 19년을 집권한 이스라엘 최장수 총리다. 우파 리쿠드당을 기반으로 강경한 안보 정책을 내세우고, 여러 정당과 연합해 권력을 이어왔다.
그러나 자신을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킬 지도자로 내세워 온 만큼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한 책임론은 그의 리더십을 압박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2024년 11월 21일 가자지구에서의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네타냐후는 하마스·헤즈볼라·이란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성과로 내세우며 자신이 이스라엘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해 왔다. 안보 실패의 책임을 묻는 비판에 군사적 성과로 대응한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안보 위협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26일 핵폭발로 텔아비브가 파괴되는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를 소셜미디어에 게시하기도 했다. 야권을 선택하면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이스라엘 좌파 활동가들이 이스라엘 총선 다음 날인 10월28일(현지시각)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아랍계 정당들과 함께하는 정부 구성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여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야권이 정부 구성 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아랍계 정당들이 차기 정부의 향방을 좌우할 세력으로 떠올랐다. ⓒAFP/연합뉴스
다만 네타냐후 교체가 곧 가자지구 전쟁의 전환을 뜻하지는 않는다. 야권을 대표하는 아이젠코트 역시 하마스 군사조직의 해체를 주장하며 강경한 안보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총리를 바꾸는 문제와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는 별개인 셈이다.
중앙선거위원회는 최종 개표 결과를 11월4일까지 발표한다. 최종 개표 결과가 나와도 차기 총리가 바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대통령에게 처음 정부 구성 임무를 받은 의원(당대표 등)은 그 뒤 28일 동안 정부 구성을 위한 정당 간 협상을 진행한다. 이 기간은 최대 14일까지 연장 가능하다. 첫 지명자가 정부 구성에 실패해 다른 의원에게 기회가 넘어가면 두 번째 지명자에게는 연장 없이 28일이 주어진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네타냐후는 총리직을 유지한다.
네타냐후 진영에서 이탈 세력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이젠코트 진영이 정부를 구성하려면 아랍계 정당들의 직접 또는 간접 지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협력이 무산되면 네타냐후와 야권 일부가 손잡는 정부나 재선거 가능성이 거론될 수 있다.
2021년에는 네타냐후 교체라는 목표가 서로 다른 정당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번에도 같은 선택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집권 연합의 과반은 흔들렸지만, 네타냐후를 대신할 정부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