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연도를 나타내는 숫자는 언제나 낯설다. 규칙적으로 1년이 더해질 뿐인데 2027이란 숫자를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다. 각자 이 서먹한 숫자와 친해지는 방법을 나름대로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새 숫자가 박힌 다이어리와 달력을 새해 한두 달 전에 사놓고 그 숫자를 미리 눈에 익히면서 다가올 1년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했다. 달력은 샀는데 다이어리는 아직 장만하지 못했다. 요 며칠 초조한 것도 그래서다. 사고 싶은 바로 그 브랜드를 또 못 사게 될까봐 불안하다.
작년 12월쯤 2026년 다이어리를 구매하려 했다가 품절 사태를 맞았다. 2025년 꽤나 만족스럽게 써서 또 사려고 한 일본 브랜드 다이어리가 온·오프라인에서 모두 빠르게 동났다. 같은 구성과 느낌의 대체재를 찾느라 종각역 서점을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이 정도면 됐다 싶은 것을 찾았는데 또 일본 브랜드였고 원래 사려던 것보다 몇 배나 비싸서 큰 결심을 하고서야 살 수 있었다.
작년 12월쯤 2026년 다이어리를 구매하려 했다가 품절 사태를 맞았다. 2025년 꽤나 만족스럽게 써서 또 사려고 한 일본 브랜드 다이어리가 온·오프라인에서 모두 빠르게 동났다. 사진은 9월2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행사장에서 방문객이 수첩을 살펴보는 모습. ⓒ연합뉴스
왜 이런 모양과 형식의 다이어리가 국내엔 없나 야속하기도 하다. 별로 대단치 않은 구성인데, 이런 군더더기 없음이 오히려 상업적으로 상당히 구현하기 어려운 경지인 것은 아닐까도 생각한다. 다이어리를 몇 번 써 보면 디자인 면에서 타협하기 싫은 조건이 생긴다. 이 조건이 하나만 있어도 고를 수 있는 다이어리 선택지는 엄청나게 줄어든다. 결국 올해 1년은 과분한 가격의 다이어리 브랜드와 외도를 했고 치밀하고 군더더기 없는 구성에 만족했다.
하지만 구관이 명관이긴 하다. 나는 2025년 경험한 그 평범한 일본 브랜드의 다이어리를 잊지 못했다. 매일 컴퓨터를 켜면 그 다이어리의 출시 여부를 새로 확인하고 한숨을 쉰다. 인스타그램 디엠을 보내고 국내 가장 오래된 매장에 전화도 걸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 분명히 기억하는 건 이 다이어리가 전년도 12월부터 쓸 수 있게 구성됐다는 것이다. 결국 11월에는 나온단 소리다.
하찮은 물욕과 집착처럼 치부하려 해도 생각보다 새해 다이어리 마련의 힘은 크다. 일 년 동안 질리지 않을 다이어리를 장만해 놓으면 그해도 그럭저럭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단 희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수첩은 다가올 365일의 축소판이다. 내 손아귀에 꽉 잡히는 새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만 원 안팎의 돈으로 1년간 이런 안정감을 살 수 있어서 고맙기도 하다.
그 다이어리가 절대로 품절되면 안 된다. 그 가격에 그런 품질은 정말 없다. 마음이 초조해져서 서촌으로 향했다. 최근 서촌에 문구점 몇 개가 모여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새 디자이너들의 다이어리를 구경하고 검토하면서 진정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 좁은 시야를 깨뜨려줄 다이어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네다섯 군데를 천천히 돌았다. 사고 싶은 다이어리는 없었다. 하지만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 있었다. 문구점마다 시대에서 자발적으로 뒤처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장 마지막에 들른 문구점에선 관심 없는 척 하면서 사람들 이야기를 엿들었다. 웬 손님 하나가 수첩에 쓸 종이 종류를 두고 어떤 브랜드의 종이가 적합할지 사장을 붙잡고 한참 논의했다. 셜록 홈즈가 종이 산지를 통해 편지 발신인을 추리해내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매장 한쪽에는 종이 진열장이 있었다. 각 칸마다 원산지와 생산자, 무게 등 종이 고유 이력이 적혀 있었다. 다른 쪽 벽에는 바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여기서 서로 다른 종이들의 필기감을 만년필로 직접 테스트할 수 있게 해놨다. 필기가 이렇게 호사스러운 취향이기도 하다고 한껏 치켜세우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종이 품질을 가리는 미세한 취향은 아니어서 경제력에 타격을 받지 않고 지나쳤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잘 나가는 일본 고급 다이어리 브랜드도 종이 질을 내세운다. 특히 호보니치 다이어리는 국제적으로 인기다. 2026년 다이어리 판매 부수가 114만 권으로 최고점을 찍었는데 이 중에서 해외 수출이 57%라고 한다. 2016년에는 61만 권을 팔았는데 백만 권을 넘어 계속 상승세다. 알고 보니 어쩔 수 없이 비싸게 샀던 올해 나의 다이어리도 호보니치였다.
앤트로픽이 역대 최대 몸값으로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는 판에 일본 다이어리는 한쪽에서 잘 나간다. 아날로그를 보존하고 지향하는 일본의 특수성이 인공지능(AI) 특이점 직전에 잠깐 반짝하는 것뿐이거나 아니면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한국 대표 문구 기업 모나미는 얼마 전 상장폐지 위기에 몰렸다. 주가가 계속 떨어져서 한국 개미들이 7월에 '국민볼펜 지키기' 운동까지 벌였는데 결국 주가가 1천 원 밑으로 떨어졌다. 모나미 주가 토론방에는 "애국하면 쪽박 찬다" 같은 자조가 올라온다. AI 시대 오랜 문구 브랜드가 상장폐지 위기에 몰렸단 소식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데 일본 다이어리 시장을 떠올리면 꼭 당연한 것이기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