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3자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3자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4년 넘게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미국, 중국, 러시아 등 3대 열강이 모여 국제 질서의 틀을 새롭게 짜는 '제2의 얄타 회담'이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얄타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소련·영국의 3국 정상이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했던 정상회담이었다. 여기서 한반도 신탁통치 방안도 나왔다. 한반도 남북분단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 EPA=연합뉴스
18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단독 보도와 미국 국무부의 역사자료 등을 종합하면, 푸틴 대통령은 지난 9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다음 달 중국에서 미·중·러 3자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 푸틴의 '제2의 얄타' 구상
푸틴 대통령의 3자 정상회담 제안은 오는 11월 18~19일 중국 선전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러시아는 외교 경로를 통해 중국에도 같은 제안을 전달했으며, 중국 측은 트럼프 대통령이 동의한다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월스트리트저널에 "회담 자체나 잠재적 의제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합의된 바는 없다"며 관련 논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다만 미국 정부 고위 당국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 회담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전직 러시아 정보요원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세계를 강대국의 세력권으로 나누는 '제2의 얄타회담(a second Yalta summit)'이라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 81년 전 얄타회담 : 강대국이 결정하는 국제질서
1945년 2월 얄타회담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 플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 연합뉴스
1945년 2월 크림반도 얄타에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참여했다.
당시 세 정상은 나치 독일 패전 이후의 유럽 질서와 폴란드 문제, 소련의 대일전 참전, 국제연합(UN) 창설 등을 논의했다. 얄타회담은 전후 세계질서를 형성한 중요한 외교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국무부 역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소련군이 동유럽 상당 지역을 장악한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은 스탈린에게 여러 사안에서 양보했다. 이후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유럽은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냉전 질서로 재편됐다.
푸틴 대통령의 이번 제안 역시 강대국들이 국제 안보질서를 논의한다는 점에서 얄타회담과 닮았다. 물론 영국 자리에는 중국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결정적인 차이도 있다. 1945년의 세 나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던 전시 동맹국이었지만, 오늘날 미국·중국·러시아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쟁국이다.
따라서 3자 정상회담이 실제 개최되더라도 곧바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출범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미국과 중국이 러시아를 동등한 협상 상대국으로 대우하는 모습 자체가 국제사회에 강력한 정치적 신호를 줄 수 있다.
◆ 러시아의 위상 회복과 중국의 계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AP통신=연합뉴스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국제질서를 주도해 왔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군사적 부상과 러시아의 군사적 도전,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대한 여러 국가의 문제 제기로 이제는 더 이상 '일극체제'라 부르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러 3자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다극화가 진행 중인 국제질서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주도 아래 중국과 러시아가 그 아래에서 각자의 몫으로 일정한 지분을 갖는 '불균등한 3자 패권'의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위상 변화도 주목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제재와 외교적 고립에 직면했던 푸틴 대통령이 미국·중국 정상과 함께 국제현안을 논의한다면, 러시아가 다시 외교무대에서 화려하게 복귀하는 모양새가 펼쳐질 수 있다.
중국에도 기회와 위험이 공존할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에서 중국 프로그램을 이끄는 윈 선 소장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중국은 열강의 축이자 잠재적으로 미국과 러시아 간의 중재자로 비쳐지기를 원한다"고 분석했다.